설명하지 않은 조항의 운명
약관 명시·설명의무
설명하지 않은 조항의 운명
약관 명시·설명의무 판례로 읽는 보험 24화
약관이라는 계약, 그리고 정보의 비대칭
보험계약은 개별적인 흥정을 통해 문구 하나하나를 합의하여 만들어지지 않는다. 보험사가 미리 마련해 둔 약관이라는 정형화된 계약 조건을, 계약자가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체결된다. 이러한 부합계약의 구조는 대량의 계약을 신속하고 균일하게 처리할 수 있게 해 주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심각한 정보의 비대칭을 낳는다. 약관을 작성한 보험사는 그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나, 계약자는 방대하고 전문적인 약관의 조항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어떤 경우에 보험금이 지급되지 않는지를 정한 면책조항, 특정 위험을 보장에서 제외하는 부담보조항, 지급액을 줄이는 감액조항은, 계약자의 이해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면서도 쉽게 간과되는 조항들이다.
이 비대칭을 교정하기 위해 법은 보험사에게 적극적인 의무를 부과한다. 상법 제638조의3은 보험자가 보험계약을 체결할 때 보험계약자에게 약관을 교부하고, 그 약관의 중요한 내용을 설명하도록 정하고 있다. 나아가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약관규제법)은 사업자가 계약을 체결할 때 고객에게 약관의 내용을 밝히고, 중요한 내용을 설명하여야 한다는 일반적인 의무를 규정한다. 이처럼 약관을 교부하고 그 중요한 내용을 명시·설명할 의무가 보험자에게 지워져 있다는 것이 우리 법의 기본 구조다.
중요한 내용을 설명할 의무
명시·설명의무의 핵심은 '중요한 내용'을 계약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데 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이란, 계약자가 계약을 체결할지 여부나 그 대가를 결정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항, 즉 그 내용을 알았더라면 계약 체결 여부나 조건에 관한 판단이 달라졌을 만한 사항을 말한다. 보험금이 지급되지 않는 사유를 정한 면책조항, 보장의 범위를 제한하는 부담보조항, 특정한 경우 보험금을 감액하는 조항 등이 전형적으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조항들은 계약자가 기대하는 보장의 실질적 범위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판례가 이 의무에 부여하는 효과는 강력하다. 보험자가 이러한 중요한 내용에 관한 설명의무를 위반한 채 계약을 체결한 경우, 보험자는 그 약관 조항을 계약의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설명되지 않은 면책조항은, 비록 약관에 문구로 존재하더라도, 그 계약에서는 없는 것처럼 취급되어 보험사가 이를 근거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설명하지 않은 조항의 운명'이다. 문서에 적혀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조항이 계약자에게 효력을 미치려면 계약 체결 과정에서 제대로 설명되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법리의 취지는 명확하다. 계약자가 알지도 못한 채 불이익한 조항에 구속되는 것을 막고, 계약자로 하여금 자신이 어떤 보장을 받고 어떤 경우에 보장에서 배제되는지를 이해한 상태에서 계약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설명의무는 단순한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 계약자의 자기결정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장치다. 따라서 약관을 교부만 하고 중요한 내용을 실질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면, 교부만으로는 설명의무를 다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설명의무 위반의 효과가 조항을 계약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게 만드는 데 있다는 점은, 계약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설명되지 않은 면책조항이 배제되면, 그 조항이 없는 상태의 약관이 계약 내용이 되어, 결과적으로 보험사가 그 면책을 원용할 수 없게 될 뿐이다. 계약은 여전히 유효하게 존속하고 나머지 조항들은 그대로 효력을 유지한다. 다시 말해 설명의무의 제재는 계약 전체를 겨누는 것이 아니라, 계약자가 안내받지 못한 특정한 불이익 조항에 한정하여 그 원용을 봉쇄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점에서 설명의무 법리는 계약의 존속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계약자가 예상하지 못한 불이익만을 정교하게 걷어내는, 비례적인 구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설명의무가 면제되는 경우
그러나 설명의무가 모든 조항에 대해 무제한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판례는 일정한 경우에는 설명의무가 면제될 수 있다고 보아, 이 의무의 범위에 합리적인 한계를 긋는다.
첫째, 거래상 일반적이고 공통된 것이어서 계약자가 별도의 설명 없이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항이다. 어떤 내용이 그 종류의 거래에서 널리 통용되어 이미 알려져 있거나, 계약자가 그 내용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경우라면, 이를 굳이 개별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고 하여 설명의무 위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설명의무는 계약자가 예상하지 못한 불의의 불이익을 막기 위한 것이므로, 이미 예상 가능한 사항에까지 미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법령에 이미 정하여진 내용을 단순히 되풀이하거나 부연하는 정도에 불과한 조항이다. 약관의 내용이 법령의 규정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면, 그 내용은 법령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므로, 이를 설명하지 않았다고 하여 계약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법령의 규정은 당사자의 설명 여부와 무관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면제 사유의 바탕에는 공통된 논리가 있다. 설명의무는 계약자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불이익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계약자가 이미 알고 있거나 알 수 있었던 내용, 또는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법령에 의해 정해져 있는 내용에까지 그 보호를 확장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설명의무의 존재 이유가 정보의 비대칭 해소에 있는 이상, 애초에 비대칭이 없거나 설명 여부가 결과를 바꾸지 못하는 사항은 그 대상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보면 면제 법리는 설명의무의 예외라기보다, 그 의무가 본래 겨냥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되짚어 확인하는 장치에 가깝다.
이러한 면제 법리는 설명의무가 오히려 형해화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확장되어 보험사에게 사실상 이행 불가능한 부담을 지우는 것을 막는다. 다만 어떤 조항이 '예상 가능한 일반적 사항'인지, 아니면 '계약자가 미처 알기 어려운 중요한 제한'인지는 명확히 갈리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바로 이 경계에서 설명의무 위반 여부가 치열하게 다투어진다. 계약자에게 뜻밖의 중대한 불이익을 주는 조항일수록 설명의무가 요구되는 강도는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설명 여부의 입증, 그리고 실무의 긴장
설명의무를 둘러싼 분쟁의 실질적인 승부는 흔히 '설명이 있었는지'를 어떻게 증명하느냐에 달려 있다. 계약자는 가입 당시 문제된 조항에 관해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보험사는 절차에 따라 충분히 설명하였다고 다툰다. 그런데 이미 시간이 지난 뒤에 가입 현장에서 오간 대화를 재구성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실무에서는 계약자가 자필로 서명한 상품설명 확인서, 중요사항 확인 절차의 기록, 전화·전자적 방식의 가입 과정에서 남은 자료 등이 설명 이행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다만 이러한 서류에 서명이 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설명의무가 언제나 이행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형식적으로 확인란에 서명을 받았더라도, 중요한 내용이 실질적으로 계약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되지 않았다면 설명의무를 다한 것으로 보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반대로 계약자가 그 내용을 충분히 알고 있었거나 다른 경위로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면, 설명이 부족했더라도 설명의무 위반을 이유로 조항의 효력을 부정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결국 설명 여부의 판단은 서류의 존부만이 아니라, 가입 과정 전체의 실질을 종합하여 이루어진다.
근래에는 대면 없이 전화나 온라인을 통해 체결되는 보험계약이 늘면서, 설명의무의 이행 방식도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비대면 채널에서는 안내 음성이나 화면을 통해 중요 사항을 고지하고 계약자의 확인을 받는 절차가 마련되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내용이 계약자가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되었는지는 여전히 심사의 대상이 된다. 형식적인 절차만 갖추었을 뿐 정작 계약자가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면, 설명의무를 다한 것으로 보기 어려울 수 있다. 어떤 채널을 통하든 설명의무의 본질, 즉 계약자가 자신의 보장 범위와 그 한계를 이해한 상태에서 계약 여부를 결정하도록 돕는다는 목적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영역에서도 양측의 이해는 균형 있게 고려되어야 한다. 계약자 보호의 관점에서, 설명의무는 정보의 비대칭 속에서 약자의 지위에 놓인 계약자가 예상치 못한 불이익을 입지 않도록 하는 최후의 방파제다. 반면 보험사의 관점에서, 모든 조항을 빠짐없이 설명하도록 요구하거나 설명의 입증 부담을 과도하게 지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이행하기 어려운 부담이 될 수 있다. 판례가 중요한 내용에 설명의무를 집중시키면서도 예상 가능한 사항과 법령 반복 사항에 대해서는 면제를 인정하는 것은, 이 두 요청 사이에서 합리적인 균형점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설명하지 않은 조항의 운명은, 그 조항이 계약자에게 얼마나 뜻밖의 중대한 제한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실질적으로 안내되었는지에 따라 갈린다.
약관의 뜻이 여러 갈래로 읽힐 때, 법은 그 불명확함의 책임을 누구에게 지우는가. 애매한 조항을 작성자에게 불리하게 해석하는 원칙을 다음 이야기에서 살펴본다.
본 콘텐츠는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개별 사안의 결론은 구체적 약관 문언과 사실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제 분쟁은 손해사정사·변호사 또는 금융감독원(1332)의 상담을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