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URANCE RESEARCH · 보험 판례

작성자 불이익 원칙

모호함은 누구의 책임인가

약 4분 읽기 · Updated 2026-07

작성자 불이익 원칙

모호함은 누구의 책임인가 판례로 읽는 보험 25화


약관이라는 '일방적으로 쓰인 계약'

보험계약은 계약자와 보험자가 조항 하나하나를 마주 앉아 흥정해 만든 문서가 아니다. 약관은 보험자가 다수의 계약을 획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미리 마련해 둔 정형화된 문언이고, 계약자는 그 완성된 문언에 가입 여부만을 결정할 뿐이다. 계약자에게는 문구를 다듬거나 표현을 바꿀 힘이 없다. 이처럼 한쪽이 작성하고 다른 한쪽은 받아들이기만 하는 계약의 구조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위험을 안고 있다. 문장이 모호하게 쓰였을 때, 그 모호함에서 비롯되는 손해를 누가 감당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일상의 사적 계약이라면 "그 문장은 애매하니 서로 절반씩 양보하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약관은 다르다. 문언을 고를 수 있었던 쪽은 오직 보험자였다. 계약자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다른 문장을 제안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표현을 선택할 권한을 독점한 쪽이 표현의 불명확함에 대한 책임도 지는 것이 공평하다. 이 단순하고도 강력한 직관을 법으로 정착시킨 것이 바로 작성자 불이익 원칙(contra proferentem)이다.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 제5조는 약관의 뜻이 명백하지 아니한 경우 고객에게 유리하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정하고 있으며, 이는 곧 약관을 작성한 사업자에게 불이익하게 해석한다는 뜻이다.

이 원칙의 뿌리는 로마법의 오랜 전통에까지 닿아 있다. 계약의 문언을 정할 수 있었던 자가 그 문언의 불명확함으로 인한 위험을 부담한다는 사고는, 근대 계약법이 정보와 힘의 불균형을 다루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오늘날처럼 정형화된 대량 거래가 지배하는 시대에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표준문언이 무수한 계약을 규율한다. 이런 환경에서 작성자 불이익 원칙은 단순한 해석 기술을 넘어, 약관 거래의 공정성을 떠받치는 구조적 장치로 기능한다. 보험은 그중에서도 문언이 복잡하고 전문적이며, 그 뜻이 사고가 난 뒤에야 비로소 다투어진다는 점에서 이 원칙이 가장 첨예하게 작동하는 영역이다.

먼저 객관적 해석, 그 다음이 작성자 불이익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오해가 있다. 작성자 불이익 원칙은 "약관 해석에서 무조건 계약자 편을 든다"는 원칙이 아니다. 이 원칙은 해석의 출발점이 아니라 최후의 보충 규칙이다. 법원이 약관을 해석할 때 밟는 순서는 분명하다.

첫 단계는 객관적·통일적 해석이다. 약관규제법 제5조 제1항은 약관을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해석하되, 고객에 따라 다르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정한다. 즉 약관은 개별 계약자가 실제로 어떻게 이해했는지가 아니라, 평균적이고 합리적인 고객의 이해가능성을 기준으로, 그 조항의 목적과 취지, 다른 조항과의 관계, 거래 관행 등을 종합해 객관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대법원은 이 원칙을 여러 사건에서 거듭 확인해 왔다. 어떤 계약자가 유별나게 유리하게 읽었다는 사정만으로 약관의 뜻이 그렇게 정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작성자 불이익 원칙은 이 객관적 해석을 다 거친 뒤에야 비로소 등장한다. 목적론적·체계적 해석을 총동원해도 문언이 여전히 둘 이상의 뜻으로 합리적으로 읽힌다면, 다시 말해 진정한 의미의 다의성(多義性)이 남는다면, 그때 비로소 법원은 그 남은 불명확함을 작성자인 보험자에게 불리하게, 고객에게 유리하게 새긴다. 순서를 뒤집어서는 안 된다. 약간의 해석 여지만 보이면 곧바로 계약자에게 유리하게 몰아가는 것은 이 원칙의 오용이다. 원칙이 작동하기 위한 전제는 '객관적 해석을 다했음에도 여전히 남는 진짜 애매함'이다.

이 순서를 강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만약 작성자 불이익 원칙을 해석의 첫 단계로 끌어올린다면, 약관의 뜻은 사실상 언제나 계약자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정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계약 당사자 사이의 균형이 아니라 한쪽으로의 기울어짐이다. 약관도 엄연히 당사자를 구속하는 계약의 내용이며, 그 안에는 보험자가 인수하기로 한 위험의 한계를 정하는 정당한 문언도 담겨 있다. 조항의 목적과 취지를 진지하게 살펴 그 뜻을 합리적으로 확정할 수 있다면, 설령 계약자에게 불리한 결론이 나오더라도 그것이 곧 약관의 뜻이다. 작성자 불이익 원칙은 이 성실한 해석 작업을 건너뛰기 위한 지름길이 아니라, 그 작업을 끝까지 밀어붙였음에도 뜻이 갈릴 때 비로소 손을 내미는 마지막 저울추다. 대법원이 이 원칙을 언급할 때 늘 '약관 조항이 객관적으로 다의적으로 해석되고 그 각각의 해석이 합리성이 있는 경우'라는 전제를 붙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살보험금 사태가 보여준 원칙의 무게

이 원칙이 실제 분쟁의 승패를 가른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이 시리즈 2화에서 다룬 이른바 재해사망 자살보험금 사태다. 당시 여러 생명보험 상품의 재해사망특약 약관에는, 피보험자가 정신질환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책임개시일로부터 2년이 지난 뒤 자살한 때에는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취지의 문언이 들어 있었다.

문제는 이 문언이 재해가 아닌 자살에 대해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으로 읽힐 수 있었다는 점이다. 보험사들은 이를 주계약의 일반사망 관련 조항을 특약에 그대로 옮겨 붙이는 과정에서 생긴 표현상의 착오이며, 자살은 본래 재해가 아니므로 재해사망보험금 지급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계약자 측은 약관 문언이 명백히 그렇게 적혀 있는 이상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고 맞섰다.

대법원은 결국 약관 문언의 객관적 의미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판단했다. 약관은 평균적인 고객의 이해가능성을 기준으로 객관적·획일적으로 해석해야 하고, 그럼에도 뜻이 명백하지 않아 다의적으로 해석된다면 고객에게 유리하게, 작성자에게 불이익하게 새겨야 한다는 법리를 확인한 것이다. 보험자가 자신이 만든 약관에 스스로 기재한 문언을, 그것이 실수였다는 이유만으로 뒤집을 수는 없다는 취지였다. 표현을 선택할 권한을 가졌던 쪽이 그 표현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진다는 원칙이, 수천억 원대의 지급 여부를 가르는 순간에 그대로 관철된 것이다.

이 사태가 특별했던 것은, 보험자 스스로 자신의 약관이 잘못 쓰였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문언대로의 이행을 거부했다는 점에 있다. 계약자가 유리하게 오해했기 때문에 다툼이 생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언 자체가 계약자에게 유리하게 명백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작성자의 실수'라는 사정을 널리 받아들여 문언을 무력화한다면, 약관에 대한 신뢰의 토대 자체가 흔들린다. 계약자는 자신이 읽은 문언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고, 보험자는 불리한 결과가 나올 때마다 '그건 실수였다'고 주장할 유인을 갖게 된다. 대법원의 판단은 이러한 도덕적 해이를 막고, 문언에 대한 신뢰라는 약관 거래의 근본 질서를 지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만 이 결론이 나오기까지 하급심의 판단이 엇갈리기도 했다는 사실은, 문언의 객관적 의미와 작성자의 진정한 의도 사이에서 법원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원칙이 지키는 것과 남기는 숙제

작성자 불이익 원칙을 두고 보험사 입장에서는 가혹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 있다. 단순한 편집상의 착오까지 계약자에게 유리하게 해석되면, 애초에 인수하려던 위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보험금을 물게 되고, 이는 결국 전체 계약자가 부담하는 보험료 인상으로 되돌아온다는 논리다. 이 지적에는 경청할 대목이 있다. 그렇기에 이 원칙이 '최후의 보충 규칙'으로서, 객관적 해석을 다한 뒤에야 조심스럽게 적용된다는 순서가 중요한 것이다. 남용되면 원칙의 정당성 자체가 흔들린다.

그러나 원칙의 무게중심은 분명하다. 약관을 쓰는 것도, 그 표현을 검토하고 감수하는 것도, 상품을 설계하고 판매하는 것도 모두 전문가 집단인 보험자의 일이다. 계약자는 그 완성된 문서를 신뢰하고 보험료를 냈을 뿐이다. 문언의 불명확함이라는 위험은 그것을 통제할 수 있었던 쪽이 지는 것이 마땅하다. 이 원칙은 계약자에게 특혜를 주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정보와 문언 통제권의 불균형을 바로잡아 계약의 공정성을 회복시키는 장치다. 그리고 보험사에게는 명확하고 오해 없는 약관을 만들 유인을, 즉 처음부터 문장을 제대로 쓸 책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작성자 불이익 원칙은 약관 해석의 국면에서 작동하는 원리이며, 그 앞 단계에는 설명의무나 개별 약정 우선 같은 다른 법리들이 함께 놓여 있다는 점이다. 이 시리즈의 다른 화에서 다루었듯, 보험자가 중요한 약관 내용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면 그 조항은 아예 계약의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 실제 분쟁에서는 이 원칙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 소비자 보호 법리가 층을 이루어 함께 작동한다. 작성자 불이익 원칙은 그 층의 가장 안쪽에서, 다른 법리로도 해결되지 않는 순수한 문언의 애매함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모호함은 누구의 책임인가. 그 문장을 고를 수 있었던 사람의 책임이다. 이 단순한 답이 약관 해석의 마지막 저울추로 남아 있는 한, 계약자는 자신이 읽은 대로의 계약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신뢰야말로, 얼굴을 마주한 적 없는 두 당사자가 오직 문서 한 장으로 수십 년의 위험을 나누어 지는 보험이라는 제도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기둥이다.


다음 화에서는 계약을 맺은 뒤 위험이 크게 바뀌었을 때의 통지의무를 다룬다. 직업이 바뀌거나 위험한 취미가 생기면 왜, 그리고 어떻게 보험사에 알려야 하는지 상법 제652조와 실무를 통해 살펴본다.


본 콘텐츠는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개별 사안의 결론은 구체적 약관 문언과 사실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제 분쟁은 손해사정사·변호사 또는 금융감독원(1332)의 상담을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