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손보험 언더라이팅의 붕괴
심사를 포기한 상품의 대가
모두를 위한 보험이 아무도 위한 보험이 아니게 된 이유 — 착한 상품이 가장 나쁜 결과를 낳다
11~13화에서 본 도덕적 해이, GA 채널의 정보 왜곡, 조직형 사기는 각각 개별 균열이었다. 실손보험은 이 세 균열이 한 상품 안에서 동시에 작동하며 서로를 증폭시킨 사례다. 그런데 그 출발점은 역설적으로 선의였다. 실손보험은 애초에 "실제 손해액을 실비로 보장한다"는 원칙과, 국민 대다수가 저렴하게 가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정책적 목표 위에서 설계됐다. 이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면 언더라이팅을 최소화할 수밖에 없었다 — 심사를 까다롭게 하면 가입 문턱이 높아져 "국민건강보험의 보완재"라는 정책적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3화에서 다룬 "정밀함과 실행 가능성의 타협"이 여기서는 정책 목표 때문에 정밀함 쪽을 거의 포기하는 방향으로 극단화됐다.
이 설계는 표준화 이전(2009년 이전) 실손보험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다. 당시 상품들은 자기부담금이 없거나 매우 낮았고, 갱신 시 손해율과 무관하게 보험료 인상 폭에 제한이 있었으며, 가입 심사도 지금 기준으로는 느슨한 수준이었다. 그 결과가 2화에서 다룬 로스차일드-스티글리츠 나선의 실사판이었다 — 의료 이용량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 상품의 가치를 정확히 알아보고 몰렸고, 자기부담금이 없으니 11화의 사후적 도덕적 해이가 그대로 발현됐으며, 13화의 나이롱 환자 네트워크가 이 낮은 심사 문턱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세 문제가 개별적으로도 심각했지만, 한 상품 안에서 동시에 작동하니 손해율은 산술적 합이 아니라 곱셈적으로 악화됐다.
보험사들의 대응은 언더라이팅을 사후적으로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세대에서 4세대로 이어지는 실손보험 개편의 실질적 내용은 전부 "애초에 느슨했던 심사와 상품 설계를 뒤늦게 정상화"하는 과정이었다. 자기부담금 비율을 단계적으로 높이고(0% → 10~30%), 비급여 항목에 대한 별도 특약 분리와 할인·할증제를 도입하고(11화에서 본 사후적 언더라이팅화), 재가입 주기를 도입해 심사 없이 평생 유지되던 계약을 15년마다 조건을 재검토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모든 조치의 공통점은, 최초 가입 시점에 못한 언더라이팅을 계약 존속 기간 내내 여러 번에 걸쳐 나눠서 하도록 구조를 바꾼 것이다 — 즉 실손보험의 진화사는 "1회성 게이트"였던 언더라이팅이 "지속적 게이트"로 바뀌어 가는 과정 그 자체다.
그럼에도 표준화 이전 구세대 실손보험 가입자들은 지금도 이 강화된 심사 체계 밖에 남아 있다. 이들은 기존 계약 조건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갱신만 반복하고 있어, 보험사 입장에서는 여전히 가장 손해율이 높은 집단이자 동시에 재계약 심사를 걸 수 없는 집단이다. 이것이 4세대 실손 전환을 유도하기 위한 각종 할인 프로모션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이며, 동시에 실손보험 전체를 하나의 상품으로 보지 않고 "세대별로 완전히 다른 위험 집단"으로 분리해서 이해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 화에서는 이 언더라이팅 강화 흐름의 반대편, 즉 대면 접촉조차 없이 진행되는 텔레마케팅(TM) 채널에서 심사가 어떤 구조적 약점을 갖는지를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