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 면책과 종합
판례가 남긴 여섯 개의 원리
정신질환 면책과 종합
판례가 남긴 여섯 개의 원리 판례로 읽는 보험 30화
자유로운 의사를 잃은 자리에서
이 시리즈의 첫 화는 우울증 상태에서의 투신을 다루었다. 그리고 마지막 화는 다시 정신의 문제로 돌아온다. 조현병, 중증 치매, 심신상실처럼 사람이 자유로운 의사결정 능력을 잃은 상태에서 벌어진 사고를 법이 어떻게 취급하는가는, 보험 면책 법리의 가장 깊은 층을 건드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보험에서 면책의 뿌리에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사로 고의로 사고를 일으킨 사람에게는 보험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법 제659조는 보험사고가 보험계약자·피보험자 또는 보험수익자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생긴 때에는 보험자가 보험금을 지급할 책임이 없다고 정한다. 자살을 면책사유로 두는 약관도 이 원리 위에 서 있다. 그런데 '고의'라는 개념은 그 사람이 자신의 행위와 결과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음을 전제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신질환이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
면책이 왜 존재하는지를 되짚어 보면 이 전제의 무게가 분명해진다. 고의 면책의 근거는 도덕적 위험의 방지에 있다. 스스로 사고를 일으켜 보험금을 노리는 행위까지 보장한다면 보험제도 자체가 존립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논리는 그 행위가 자유로운 의사에 기한 것일 때에만 성립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벌어진 일에는, 방지해야 할 도덕적 위험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다. 면책의 근거가 사라진 자리에서 면책만을 관철하는 것은 원리에 어긋난다. 정신질환의 문제가 면책 법리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린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신상실과 면책의 한계
만약 어떤 사람이 조현병의 급성 증상이나 심각한 정신적 장애로 인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그 상태에서 자신을 해치는 결과에 이르렀다면, 이를 온전한 의미의 '고의'라 부를 수 있는가. 대법원은 이 물음에 신중하게 답해 왔다. 피보험자가 정신질환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망의 결과에 이른 경우라면, 이는 자유로운 의사에 기한 고의의 자살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의사가 없는 곳에는 온전한 고의도 없다는 이 법리는, 면책이라는 무거운 결과가 오직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에만 뒤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지킨다.
물론 이 판단은 사실인정의 문제를 동반한다. 사고 당시 피보험자가 실제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는지는 진료 기록, 정신과적 소견, 사고 전후의 정황 등을 종합해 신중히 가려야 한다. 정신질환의 병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심신상실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그 가능성을 가볍게 배제해서도 안 된다. 이 섬세한 판단이야말로 면책 법리의 가장 어려우면서도 인간적인 대목이다.
여기서 이 시리즈가 22화에서 다룬 입증책임의 문제가 다시 등장한다. 자살이라는 면책사유의 존재는 이를 주장하는 보험자가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자살이 자유로운 의사에 기한 것이었는지 역시 면책을 주장하는 보험자가 밝혀야 할 몫에 가깝다. 사망의 경위가 끝내 불분명하게 남는다면, 그 불이익은 입증의 부담을 지는 쪽으로 돌아간다. 정신질환과 면책의 문제는 이처럼 실체법상의 원리인 '자유로운 의사'와 절차법상의 원리인 '입증책임'이 함께 작동하는 무대다. 유족에게 사망자의 내면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혹하며, 그 부담의 분배가 결론을 좌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른 화를 관통한 여섯 개의 원리
이제 이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서른 개의 화를 가로질러 흐른 여섯 개의 원리를 정리하려 한다. 개별 사건의 결론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밑바닥에는 반복해서 되살아난 몇 가지 뼈대가 있었다. 우울증 투신에서 시작해 자살, 음주와 무면허, 고지의무와 후유장해, 태아와 출산, 실손보상과 소멸시효, 부정취득과 사기취소, 재해분류와 인과관계, 설명의무와 요양병원, 그리고 암 진단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함께 읽은 사건들은 겉으로 서로 무관해 보였다. 그러나 그 안을 흐르는 원리는 놀라울 만큼 일관되어 있었다.
첫째, 약관은 평균적 고객을 기준으로 객관적으로 해석하며, 그래도 모호하면 작성자에게 불이익하게 새긴다. 약관의 뜻은 개별 계약자의 주관이 아니라 합리적 고객의 이해가능성을 기준으로 정해지고, 객관적 해석으로도 다의성이 남으면 그 불명확함은 문언을 고른 보험자가 진다(25화 작성자 불이익 원칙). 표현을 선택할 권한을 가진 쪽이 그 표현의 책임도 진다는 이 원리는, 2화의 자살보험금 사태에서 실제 지급 여부를 갈랐다.
둘째, 고의나 자살 같은 면책사유의 존재는 보험자가 입증해야 한다. 보험금 청구자가 자신이 고의로 사고를 내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지급을 거절하려는 보험자가 면책사유를 증명해야 한다(22화 자살 입증책임). 사망의 원인이 끝내 불분명하게 남는다면, 그 불이익은 입증책임을 지는 보험자에게 돌아간다.
셋째, 인과관계가 결론을 가른다. 고지의무를 위반했더라도 그 위반과 사고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면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고(5화), 손해가 담보된 위험에서 상당인과관계 있게 비롯되었는지가 지급 범위를 정한다(23화 상당인과관계). 관련이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법이 요구하는 것은 상당한 인과의 연결이다.
넷째, 상법 제663조의 불이익변경금지가 소비자를 지킨다. 상법의 보험편 규정은 원칙적으로 약관으로 계약자·피보험자·수익자에게 불리하게 바꿀 수 없다. 최고 절차 없는 자동 실효약관이 무효인 것도(27화), 여러 소비자 보호 법리가 관철되는 것도 이 조항이 든든한 바탕이 되어 준 덕이다.
다섯째, 설명의무를 다하지 않은 조항은 힘을 잃는다. 상법 제638조의3은 보험자가 계약을 맺을 때 약관의 중요한 내용을 설명하도록 정하며, 이를 어긴 경우 보험자는 그 내용을 계약의 내용으로 주장하지 못한다(24화 설명의무). 계약자가 뜻을 알지 못한 채 받아들인 조항으로 계약자를 불리하게 옭아맬 수는 없다는 원리다.
여섯째, 계약자의 성실이 최선의 방어다. 정확한 고지(5·6화), 위험변경의 통지(26화), 진단과 치료 기록의 확보(28·29화)는 모두 계약자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대비다. 법이 계약자를 두텁게 보호하지만, 그 보호를 온전히 누리는 출발점은 언제나 계약자 자신의 성실에 있다.
이 여섯 원리는 각각 따로 서 있는 조각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의 큰 균형을 이룬다. 보험은 정보와 힘이 한쪽으로 기운 계약이다. 상품을 설계하고, 약관을 쓰고, 위험을 계산하는 전문가 집단과, 그 완성된 문서를 신뢰하고 보험료를 내는 개인 사이에는 결코 대등하다고 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앞의 다섯 원리는 이 간극을 메워 계약자를 지키는 법의 장치다. 약관 해석의 저울추를, 입증의 부담을, 인과의 요구를, 불이익변경의 금지를, 설명의 책임을 두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다. 그러나 법의 보호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여섯째 원리, 곧 계약자의 성실은 그 보호가 실제로 힘을 발휘하기 위한 마지막 조건이다.
남기는 말
이 여섯 개의 원리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앞의 다섯 원리가 계약자를 보호하는 법의 방패라면, 마지막 여섯째 원리는 그 방패를 온전히 쓰기 위해 계약자가 갖추어야 할 준비다. 법은 정보와 힘의 불균형 위에 놓인 계약자를 지키려 하지만, 그 보호는 계약자의 성실과 만날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정확히 알리고, 제때 통지하고, 필요한 기록을 남기는 일. 그 평범한 성실이 결국 가장 강한 방어가 된다.
이 시리즈가 판례를 다루면서도 구체적 사건번호를 앞세우기보다 그 안에 담긴 원리를 좇아온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판례는 특정 사건의 결론이지만, 그 결론을 이끈 법리는 시간이 지나도 되풀이해 살아난다. 오늘 어떤 계약자가 마주한 다툼은, 이미 오래전 다른 계약자가 겪은 다툼과 본질에서 같은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개별 사건의 승패를 외우는 것보다, 그 밑에 흐르는 원리를 이해하는 편이 훨씬 더 오래 쓸모가 있다. 원리를 아는 계약자는 자신이 마주한 상황이 어느 원리의 문제인지 가늠할 수 있고, 그것만으로도 막연한 불안에서 벗어나 다툼의 실체를 볼 수 있다.
물론 원리를 안다고 해서 모든 분쟁이 저절로 풀리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 사안의 결론은 언제나 그 계약의 약관 문언과 사실관계라는 흙 위에서 자란다. 같은 원리라도 사실이 다르면 결론이 갈리고, 미묘한 문언의 차이가 승패를 뒤집기도 한다. 그러니 실제 분쟁에 놓였다면 손해사정사나 변호사, 또는 금융감독원의 상담을 통해 자신의 사안을 구체적으로 점검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시리즈가 드린 것은 정답이 아니라, 그 정답을 찾아가는 길에서 방향을 잃지 않게 해 줄 나침반이다.
판례로 읽는 보험, 서른 개의 이야기를 여기서 맺는다. 개별 사건의 승패보다 오래 남는 것은 그 안에 흐르는 원리다. 이 여섯 개의 원리가 독자 여러분이 자신의 계약을 이해하고, 언젠가 마주할지 모를 분쟁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작은 나침반이 되기를 바란다. 긴 여정을 함께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이 시리즈를 마친다.
서른 화에 걸친 '판례로 읽는 보험'을 완결합니다. 함께 읽어 주신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본 콘텐츠는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개별 사안의 결론은 구체적 약관 문언과 사실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제 분쟁은 손해사정사·변호사 또는 금융감독원(1332)의 상담을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