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URANCE RESEARCH · 보험 판례

고지의무 위반과 인과관계

숨긴 병과 다른 이유로 죽었다면

약 4분 읽기 · Updated 2026-07

고지의무 위반과 인과관계

숨긴 병과 다른 이유로 죽었다면 판례로 읽는 보험 5화


고지의무라는 계약의 출발점

보험은 위험을 사고파는 계약이다. 보험사는 가입자가 안고 있는 위험의 크기를 정확히 알아야 그에 맞는 보험료를 매기고 인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위험에 관한 정보는 대부분 가입자 쪽에 몰려 있다. 자신의 병력, 건강 상태, 직업의 위험성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가입자 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험법은 계약자와 피보험자에게 계약을 맺을 때 중요한 사항을 사실대로 알릴 의무, 즉 고지의무를 지운다.

상법 제651조는 보험계약 당시 계약자 또는 피보험자가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중요한 사항을 고지하지 않거나 부실하게 고지한 때에는, 보험자가 그 사실을 안 날부터 일정 기간 내에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정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항'이란 보험사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계약을 맺지 않았거나 적어도 같은 조건으로는 맺지 않았을 만한 사항을 말한다. 고혈압, 당뇨, 심장질환의 치료 이력이나 과거의 수술·입원 경력 등이 대표적이다.

고지의무 위반이 성립하려면 몇 가지 요건이 함께 갖추어져야 한다. 우선 알리지 않았거나 사실과 다르게 알린 사항이 '중요한 사항'이어야 하고, 그 위반에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어야 한다. 단순한 착오나 경미한 부주의로 빠뜨린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실무에서는 보험사가 청약서의 질문표를 통해 묻는 사항이 곧 중요한 사항으로 추정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 질문에 사실대로 답했는지가 일차적 판단 기준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위반의 요건이 모두 갖추어져 해지가 정당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보험금 지급 여부는 곧바로 결정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상법 제655조의 인과관계라는 또 하나의 관문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까지만 보면 결론은 단순해 보인다. 병을 숨기고 가입했으니 계약은 해지되고 보험금도 못 받는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고, 보험사도 종종 그렇게 안내한다. 그러나 상법은 여기에 결정적인 한 겹을 더 얹는다. 바로 인과관계다.

상법 제655조가 열어 둔 문

상법 제655조는 고지의무 위반의 효과를 규율하면서, 매우 중요한 단서를 두고 있다. 고지의무를 위반한 사실과 보험사고의 발생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는 경우에는, 보험자가 계약을 해지하더라도 이미 발생한 보험사고에 대한 보험금은 지급해야 한다는 취지다. 즉 고지의무 위반이라는 잘못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위반이 실제 일어난 사고와 연결되어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로 다루어진다.

이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이 화의 핵심이다. 고지의무 위반이 인정되면 보험사는 앞으로의 계약 관계를 끊을 권리, 곧 해지권을 갖는다. 이는 부정확한 정보 위에 세워진 계약을 청산할 수 있는 보험사의 정당한 권한이다. 그러나 해지권을 행사해 계약을 미래를 향해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과, 이미 발생한 특정 사고의 보험금까지 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다르다. 후자는 오직 숨긴 사실과 그 사고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을 때에만 정당화된다.

왜 이런 구조를 두었을까. 고지의무 제도의 목적은 보험사가 위험을 정확히 평가하도록 돕는 데 있지, 계약자의 사소한 잘못을 빌미로 모든 사고를 면책하려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숨긴 병과 아무 관련 없는 사고까지 전부 면책된다면, 고지의무 위반은 실제 손해와 무관한 일종의 몰수적 제재로 변질된다. 상법 제655조의 인과관계 요건은 이런 과도한 제재를 막고, 고지의무 위반의 효과를 그 위반이 실제로 위험을 실현시킨 범위로 제한한다.

이 대목에서 계약의 미래와 과거를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해지는 계약을 앞으로를 향해 소멸시키는 행위다. 보험사가 부정확한 정보 위에 세워진 계약 관계를 더 이상 유지하지 않겠다는 선택이며, 이는 인과관계가 있든 없든 고지의무 위반이 인정되면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발생해 버린 특정 보험사고의 지급 여부는 계약의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관한 문제다. 그 과거의 사고가 계약자의 위반과 원인적으로 이어져 있지 않다면, 계약을 앞으로 끊는 것과는 별개로 그 사고에 대한 보상 책임은 살아남는다. 해지권과 개별 사고에 대한 보험금 지급 의무를 이렇게 시간의 축으로 갈라 이해하면, 상법 제655조가 왜 '해지는 되지만 보험금은 준다'는 언뜻 모순돼 보이는 결론을 허용하는지가 자연스럽게 풀린다.

고혈압을 숨겼으나 교통사고로 죽었다면

가장 자주 인용되는 전형적 사례로 이 법리를 그려 보자. 어떤 사람이 고혈압으로 치료받은 이력이 있었으나 이를 고지하지 않고 보험에 가입했다. 얼마 뒤 그는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보험사는 고혈압 병력의 불고지를 이유로 계약 해지와 보험금 지급 거절을 주장한다.

여기서 상법 제655조를 적용하면 결론은 이렇게 갈린다. 그가 숨긴 사실은 고혈압이고, 실제 사망 원인은 교통사고에 의한 외상이다. 고혈압이 그 교통사고의 발생이나 사망 결과에 어떤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정이 없다면, 숨긴 사실과 보험사고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없다. 따라서 보험사는 고지의무 위반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할 수는 있어도, 이 교통사고 사망에 대한 보험금은 지급해야 한다. 병을 숨긴 것은 잘못이지만, 그 잘못이 이번 죽음을 불러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보아야 균형이 잡힌다. 만약 그가 숨긴 것이 중증 심장질환이었고 실제 사망 원인이 심근경색이었다면, 숨긴 사실과 사고 사이의 인과관계가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이때는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보험사는 해지와 함께 보험금 지급도 거절할 수 있다. 결국 같은 '불고지'라도 그 병이 이번 사고와 이어져 있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결론에 이른다. 인과관계라는 다리가 놓여 있느냐 끊겨 있느냐가 승패를 가르는 것이다.

경계에 놓인 사례일수록 다툼은 치열해진다. 예컨대 고혈압을 숨긴 사람이 뇌출혈로 사망한 경우, 고혈압은 뇌출혈의 대표적 위험인자이므로 인과관계가 인정될 여지가 크지만, 사망에 이르게 한 뇌출혈이 외상이나 다른 독립된 원인에서 비롯되었다면 결론은 다시 흔들린다. 또 기저질환이 사고에 부분적으로만 기여한 경우, 그 기여를 인과관계의 '존재'로 볼 것인지 '부존재'로 볼 것인지를 두고 의학적·법적 평가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이처럼 인과관계는 있고 없고가 칼로 자르듯 나뉘지 않는 회색지대를 품고 있으며, 바로 그 회색지대에서 손해사정과 소송의 실질적 공방이 벌어진다.

인과관계 부존재는 누가 증명하는가

이 지점에서 실무상 가장 예민한 문제가 등장한다. 인과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누가 증명해야 하는가. 판례는 이 증명책임을 보험금을 청구하는 쪽, 즉 계약자나 수익자 측에 있다고 본다. 고지의무 위반 자체가 인정되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보험금을 받으려면 청구자가 '숨긴 사실과 이번 사고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증명책임의 배분은 실전에서 결코 가볍지 않다. 보험사가 고지의무 위반을 근거로 지급을 거절할 때, 청구자는 단지 '그 병과 이번 사고는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사망진단서, 사고 경위 자료, 부검이나 진료기록, 필요하다면 의학적 소견을 통해 인과관계의 부존재를 뒷받침해야 한다. 앞의 사례처럼 교통사고 외상으로 인한 사망이 명백한 경우에는 인과관계 부존재의 증명이 비교적 수월하지만, 사망 원인이 복합적이거나 기저질환이 어느 정도 기여했을 가능성이 남는 경우에는 다툼이 치열해진다.

왜 이 증명책임이 청구자 측에 놓이는지도 음미해 볼 만하다. 논리적으로 고지의무 위반이라는 사실이 일단 확정되면, 그 위반은 위험 평가의 기초를 왜곡한 것이므로 사고와의 관련성이 어느 정도 추정되는 출발선에 선다. 그 추정을 깨뜨려 '그럼에도 이 사고는 위반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쪽, 즉 예외적 사정을 내세워 이익을 얻으려는 청구자가 그 예외를 증명하는 것이 증명책임 분배의 일반 원리에 부합한다. 이는 계약자에게 불리해 보이지만, 뒤집어 보면 인과관계만 끊어내면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열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관건은 포기가 아니라, 그 단절을 뒷받침할 자료를 얼마나 충실히 확보하고 제시하느냐에 있다.

이 화가 남기는 실무적 메시지는 두 가지다. 계약자와 유족에게는, 고지의무 위반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청구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상법 제655조는 숨긴 사실과 무관한 사고에 대해서는 보험금을 받을 길을 분명히 열어 두고 있으며, 관건은 인과관계의 단절을 자료로 입증하는 데 있다. 동시에 보험 실무에는, 고지의무 위반이 확인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모든 사고의 자동적 면책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해지권과 개별 보험금 지급 의무를 층위를 나누어 판단해야 한다는 절제가 요구된다. 숨긴 병과 다른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면, 그 죽음은 여전히 보장 안에 있을 수 있다.


다음 화에서는 같은 고지의무를 시간의 관점에서 다시 본다. 보험사가 위반 사실을 알고도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기간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 시간이 지나면 해지권 자체가 사라진다. 제척기간을 둘러싼 다툼을 살핀다.


본 콘텐츠는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개별 사안의 결론은 구체적 약관 문언과 사실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제 분쟁은 손해사정사·변호사 또는 금융감독원(1332)의 상담을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