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지표의 함정 — 숫자가 좋아지면 오래 사는가
검사 결과를 고치는 것과 병을 고치는 것은 다르다
대리지표의 함정 — 숫자가 좋아지면 오래 사는가
검사 결과를 고치는 것과 병을 고치는 것은 다르다 | 건강 설계 200 7화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것
건강에서 사람이 진짜 원하는 결말은 몇 개 안 된다. 오래 사는 것, 아프지 않게 사는 것, 심근경색·뇌졸중·암·골절·치매 같은 사건을 겪지 않는 것, 자기 발로 걸어 다니는 것. 이런 것을 임상적 결말(hard endpoint) 이라 부른다.
문제는 이걸 재려면 오래 걸린다는 데 있다. 40대에게 어떤 개입을 하고 심근경색이 줄었는지 보려면 10년, 20년이 필요하고, 참가자 수만 명이 필요하다. 비용이 감당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리지표(surrogate marker) 를 쓴다. 콜레스테롤 수치, 혈압, 당화혈색소, 골밀도, 종양 크기, 염증 표지자. 이런 것들은 몇 주~몇 달이면 움직이고 적은 인원으로도 잴 수 있다.
대리지표는 필수적인 도구다. 이것 없이는 약 개발이 불가능하다. 다만 대리지표가 좋아진 것과 실제 결말이 좋아진 것은 다른 문장이고, 이 둘이 갈린 사례가 의학사에 반복해서 나왔다.
갈렸던 사례들
부정맥 억제제. 심근경색 후 심실 조기수축이 많은 사람은 돌연사 위험이 높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이 부정맥을 억제하는 약을 쓰면 돌연사가 줄 것이라 기대했고, 실제로 약은 부정맥을 잘 억제했다. 대리지표는 완벽하게 개선됐다. 그런데 대규모 무작위배정 시험에서 사망률이 오히려 높아졌다. 부정맥은 위험의 표지였지, 그 자체가 손대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HDL을 올리는 약. HDL이 높은 사람은 심혈관질환이 적다는 관찰이 확고했다. 그래서 HDL을 크게 올리는 약이 개발됐고, 실제로 HDL을 큰 폭으로 올렸다. 그런데 임상 결말은 개선되지 않았고, 어떤 약에서는 사망이 늘어 개발이 중단됐다. HDL 수치는 좋은 대사 상태의 결과 표지에 가까웠지 개입 대상이 아니었다(112화).
혈당 강하. 당화혈색소를 낮추면 합병증이 준다는 것은 대체로 맞다. 그런데 어떤 약으로, 얼마나 빨리, 어느 대상에서 낮추느냐에 따라 결말이 달랐다. 고위험 환자에게 공격적으로 목표를 낮춘 시험에서 사망이 증가한 사례도 있었다. 같은 숫자를 같은 만큼 내려도 방법에 따라 결말이 다르다는 것이 여기서 드러났다.
골밀도. 골밀도를 올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골절을 막는 것이 목적이다. 골밀도가 오르는 폭과 골절이 주는 폭은 약마다 비례하지 않는다(176화).
왜 갈리나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표지와 원인의 혼동. 어떤 지표는 병의 원인이 아니라 병 과정의 결과물이다. 화재 현장의 연기를 없앤다고 불이 꺼지지 않는다. 부정맥과 HDL이 이 경우였다.
둘째, 약의 다른 작용. 약은 목표한 지표만 건드리지 않는다. 다른 경로에도 작용하고, 그 효과가 이득을 상쇄하거나 뒤집을 수 있다.
셋째, 인과 경로의 일부만 건드림. 어떤 지표가 진짜 원인 경로에 있어도, 그것 하나를 고치는 것으로 전체 위험이 비례해서 줄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대리지표는 언제 믿나
전부 못 믿는다는 결론은 과하다. 어떤 대리지표는 임상 결말과의 연결이 여러 약제·여러 인구에서 반복 검증됐다.
가장 잘 검증된 예가 혈압과 LDL 콜레스테롤이다. 서로 다른 기전의 약으로 낮춰도, 낮춘 만큼 심혈관 사건이 비례해서 줄었다. 유전 변이로 평생 낮은 사람에서도 같은 방향이었다. 이 정도로 여러 각도에서 일치하면 대리지표를 결말의 대용으로 쓸 수 있다. 7부에서 이 두 지표를 중심에 놓는 이유가 이것이다.
검증된 대리지표의 조건은 대략 이렇다.
- 여러 종류의 개입으로 낮춰도 결말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 낮춘 정도와 결말 개선 정도가 비례한다
- 유전 등 다른 경로의 증거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 반대 방향의 대규모 실패 사례가 없다
건강검진 결과지를 읽을 때
이 문제는 논문이 아니라 내 손에 들린 검진 결과지에서 가장 자주 만난다. 결과지에는 수십 개의 숫자가 있고, 각각에 화살표가 붙어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첫째, 이 숫자가 검증된 대리지표인가. 혈압과 LDL은 그렇다. 반면 어떤 항목들은 연관은 있지만 그것을 직접 낮춰서 이득을 봤다는 증거가 약하다.
둘째, 이 숫자를 고치는 개입이 다른 곳에 무엇을 하는가. 숫자만 보고 개입을 고르면, 지표는 예뻐지고 몸은 나빠지는 경우가 생긴다.
이 두 질문은 특히 보충제·기능식품 광고에서 결정적이다. 그 광고들이 제시하는 것은 거의 항상 대리지표이고, 임상 결말까지 간 근거는 드물다. 13부(검진·바이오마커)에서 항목별로 다시 다룬다.
반대 함정 — 대리지표를 무시하는 것
균형을 위해 반대편도 적어 둔다. "결말만 중요하다"며 지표를 아예 무시하는 태도도 틀렸다.
혈압이 높은 것을 방치하면서 "심근경색이 오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건은 확률이고, 확률은 그 지표를 통해 관리된다. 검증된 대리지표는 미래 사건의 조기 신호이며, 그것이 예방의학이 성립하는 근거다.
핵심은 대리지표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표가 검증됐는지 구분하는 것이다.
결말로 잰 연구를 찾는 법
논문 초록에서 확인할 것은 두 줄이다. 주 결말(primary outcome)이 무엇인가, 그리고 관찰 기간이 얼마인가.
주 결말이 "사망", "심근경색", "뇌졸중", "골절", "입원"이면 임상적 결말이다. "LDL 감소", "체중 변화", "염증 표지자 감소", "골밀도 증가"면 대리지표다. 대리지표 연구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그 결과로 말할 수 있는 문장이 다르다는 뜻이다.
여기에 자주 등장하는 변형이 하나 더 있다. 복합 결말(composite endpoint) 이다. "심혈관 사건"이라는 하나의 결말 안에 사망·심근경색·뇌졸중·재관류 시술·입원이 함께 묶인다. 이렇게 하면 사건 수가 늘어 통계적 검정력이 확보되지만, 문제도 생긴다. 가장 가벼운 항목이 전체 결과를 끌고 가는 경우다. 사망은 차이가 없는데 시술 건수만 줄어서 "심혈관 사건 20% 감소"가 되는 식이다.
그래서 복합 결말을 보면 항상 구성 요소별 결과를 찾아본다. 좋은 논문은 표로 함께 싣는다. 사망과 심근경색에서 방향이 같으면 신뢰가 올라가고, 가벼운 항목에만 차이가 있으면 결론을 절반만 받는다.
정리
- 핵심 — 검사 수치가 좋아지는 것과 병이 덜 생기는 것은 다른 문장이다. 부정맥 억제와 HDL 상승은 지표를 개선하고도 결말이 나빠지거나 그대로였던 대표 사례다.
- 근거 등급 — [RCT] 대리지표와 결말이 갈린 사례들은 모두 대규모 무작위배정 시험에서 확인됐다. 혈압과 LDL이 검증된 대리지표라는 것도 [RCT]와 유전 기반 분석의 일치로 지지된다.
- 내가 할 것 — 검진 결과지의 숫자를 볼 때 두 가지를 묻는다. 이 지표가 결말과 반복 검증된 것인가 / 이 숫자를 고치는 방법이 다른 곳에 무엇을 하는가.
- 모르는 것 — 새로운 바이오마커 대부분은 아직 이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 연관이 있다는 것과 낮추면 이득이라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큰 간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