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세 가지 장치 — 사전지시서·의료대리인·POLST
비교하면 한국 제도의 공백이 선명해진다
미국의 세 가지 장치 — 사전지시서·의료대리인·POLST
비교하면 한국 제도의 공백이 선명해진다 | 죽음 설계 54화
왜 비교하는가
다른 나라 제도를 소개하는 이유는 그것이 낫다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비교하면 우리 제도가 무엇을 다루고 무엇을 안 다루는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용적 이유도 있다. 제도가 안 하는 일을 개인이 설계로 메울 수 있는 경우가 있다(66화).
[등급 B — 미국은 주(州)마다 제도가 다르다. 아래는 일반적 구조의 요약이며, 특정 주의 법을 서술한 것이 아니다.]
장치 ① — 사전지시서(Advance Directive)
본인이 미리 자신의 의료에 관한 뜻을 밝혀 두는 문서다. 넓은 의미로는 아래 ②를 포함하는 우산 개념으로 쓰인다.
좁은 의미로는 리빙윌(living will) — 어떤 상태에서 어떤 치료를 원하는지를 적은 문서를 가리킨다.
한국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성격이 비슷하지만, 적용 범위가 더 넓다. '임종과정'이라는 좁은 관문이 없고, 회복 불가능한 상태 전반을 다룰 수 있게 설계된 경우가 많다.
장치 ② — 의료대리인(Healthcare Proxy / Durable Power of Attorney for Health Care)
이것이 한국에 없는 장치다.
본인이 판단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자신을 대신해 의료 결정을 할 사람을 미리 지정하는 제도다. 지정된 대리인은 폭넓은 상황에서 결정 권한을 갖는다.
왜 이 장치가 중요한가. 문서로 모든 상황을 예상해 적어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서는 예상한 상황만 다루지만, 사람은 예상 못 한 상황도 다룰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가 있다. 누가 결정하는지를 본인이 정할 수 있다. 법이 정한 가족 순위가 아니라, 본인이 신뢰하는 사람을 지정한다. 52화에서 본 문제 — 십 년간 안 본 자녀가 결정하고 몇 년을 간병한 사람이 배제되는 것 — 을 이 장치가 해결한다.
장치 ③ — POLST 계열
Physician Orders for Life-Sustaining Treatment. 이름 그대로 의사의 지시서다.
앞의 두 장치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 의사가 서명한 의료 지시이므로 현장에서 즉시 효력을 갖는다
- 응급의료체계가 이 문서를 인정한다. 구급대원이 보고 판단할 수 있다
- 말기 환자를 대상으로 한다. 건강한 사람이 쓰는 것이 아니다
- 대개 눈에 띄는 색의 양식으로 만들어, 집 안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둔다
36화에서 본 문제 — 119를 부르면 소생술이 시작된다 — 를 정면으로 해결하는 장치가 이것이다.
세 장치의 역할 분담
정리하면 이렇다.
| 장치 | 누가 쓰나 | 언제 작동하나 |
|---|---|---|
| 리빙윌 | 건강한 사람도 | 판단 불가 상태에서 |
| 의료대리인 | 건강한 사람도 | 판단 불가 상태의 모든 결정 |
| POLST | 말기 환자 | 지금 당장, 현장에서 |
세 개가 서로 다른 구멍을 메운다.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이 설계의 전제다.
한국과 비교하면
한국에는 ①에 해당하는 것(사전연명의료의향서·연명의료계획서)이 있고, ②가 없으며, ③에 해당하는 현장 효력 장치가 뚜렷하지 않다[미확인 — 국내 응급의료체계에서의 적용은 확인 필요].
그리고 ①의 적용 범위도 '임종과정' 판단 이후로 좁다(51화).
공백은 둘이다.
공백 A — 누가 결정하는가를 본인이 정할 수 없다. 법이 정한 가족 순위로 간다. 공백 B — 문서가 응급 현장에서 즉시 작동하지 않는다.
공백을 메우는 개인의 설계
제도가 없어도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66화에서 자세히 다루지만 여기서 방향만 적는다.
공백 A에 대해. - 자유 서술에 "이 사람의 판단을 따라 달라"고 명시한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실무에서 근거가 된다. - 그 사람에게 판단 기준을 미리 알려 둔다(53화의 세 문장). - 가족 전체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미리 알려진 지정은 나중에 덜 반박된다.
공백 B에 대해. - 사전 문서를 등록한다. 종이만 있으면 조회되지 않는다(49화). - 사본을 집의 잘 보이는 곳에 둔다. 냉장고 문이 흔히 쓰이는 자리다. - 119가 아닌 전화번호를 확보한다(47화). 이것이 가장 실질적인 대응이다.
다른 나라의 다른 방식
미국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를 짧게 적어 둔다[등급 B — 개요 수준이며 각국 제도의 세부는 확인 필요].
독일·오스트리아 계열. 사전지시서(Patientenverfügung)에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고, 성년후견과 연결한 구조를 갖는다.
영국. 사전거부결정(advance decision)과 지속적 대리권(lasting power of attorney)을 두고, 능력 판단에 관한 별도 법률 체계를 갖는다.
일본. 법률로 강하게 규율하기보다 학회 지침과 합의 절차 중심으로 운영되어 온 특징이 있다.
이 비교에서 얻을 수 있는 관점 하나. 어느 나라도 완성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자율성을 강하게 보호하면 남용 우려가 커지고, 절차를 엄격히 하면 실제 필요한 시점에 작동하지 않는다. 한국 제도의 좁은 설계도 그 긴장의 한 형태다.
이 화가 남기는 것
① 한국 제도에는 두 개의 공백이 있다. 대리인 지정과 현장 효력. ② 공백은 개인의 설계로 부분적으로 메울 수 있다. 자유 서술, 사전 공유, 대체 전화번호. ③ 제도 개선의 방향을 아는 것도 준비의 일부다. 제도는 바뀌고, 바뀌면 다시 확인해야 한다(92화).
제도가 없다고 준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화의 결론을 오해하지 않도록 한 문단을 더한다. 한국에 의료대리인 제도가 없다는 사실이 "그러므로 준비해도 소용없다"로 읽히면 안 된다.
실제로 임종기 의료 결정의 대부분은 법적 권한이 아니라 사실상의 영향력으로 이루어진다. 의료진은 법이 정한 순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환자를 돌보고 상황을 아는 사람과 이야기한다.
그래서 본인이 "이 사람의 판단을 따라 달라"고 명시해 두면, 법적 구속력이 없어도 그 사람의 발언권이 실제로 커진다. 가족 사이에서 "아버지가 그렇게 정하셨다"는 근거가 생기기 때문이다.
제도의 공백은 문서와 대화로 상당 부분 메워진다. 다만 완전히 메워지지는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66화에서 이 공백을 다시 정면으로 다룬다.
국경을 넘으면 문서는 어떻게 되나
이 화가 실무적으로 필요해지는 상황이 하나 더 있다. 해외에 살거나 자주 오가는 경우다.
원칙적으로 사전지시 관련 문서는 작성지의 법에 따라 만들어지고, 효력도 그 관할권에서 논의된다. 한국에서 등록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다른 나라 병원 시스템에서 조회되지 않고, 미국에서 만든 의료대리인 위임장이 한국 병원에서 그대로 권한을 만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두 나라를 오가며 사는 사람은 실질적으로 양쪽에 각각 준비해야 한다. 번거롭지만 대안이 없다.
그리고 어느 쪽에서도 확실히 작동하는 것이 하나 있다 — 가족이 알고 있는 것. 문서의 효력은 관할권을 넘지 못하지만, "아버지는 이런 상태를 원하지 않으셨다"는 가족의 진술은 어디서든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 문서를 번역해 소지하는 것도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
같은 문제가 유학·주재원 자녀에게도 적용된다(116화). 부모의 뜻을 아는 자녀가 국내에 없고, 국내에 있는 자녀가 뜻을 모르는 상황이 실제로 생긴다. 뜻은 문서보다 사람을 따라 이동한다.
오늘의 실행
- 자유 서술에 결정을 맡길 사람을 명시한다. 법적 구속력과 별개로 실무의 근거가 된다.
- 그 사실을 가족 전체에게 알린다. 알려진 지정은 덜 반박된다.
- 집의 잘 보이는 곳에 사본을 둔다. 응급 상황에서 종이 한 장이 크다.
다음 화에서는 안락사와 조력사망 — 나라마다 완전히 다른 제도를 관할권별로 나눠 본다. 뭉뚱그리면 오독이 생기는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