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결정의 윤리 — 남을 대신해 정한다는 것
대체판단과 최선의 이익, 그리고 둘 다 안 될 때
대리결정의 윤리 — 남을 대신해 정한다는 것
대체판단과 최선의 이익, 그리고 둘 다 안 될 때 | 죽음 설계 53화
문제의 구조
누군가를 대신해 그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결정을 내린다. 이것은 인간이 하는 가장 무거운 일 중 하나다.
윤리학과 임상윤리는 이 문제를 오래 다뤄 왔고, 두 개의 기준을 정리해 두었다[등급 A — 두 기준의 구별은 임상윤리에서 확립되어 있다].
기준 ① — 대체판단
"이 사람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했을까."
본인의 가치관, 과거의 발언, 삶의 방식을 근거로 그의 선택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접근이다.
작동하는 조건은 명확하다. 본인의 가치관을 알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문서, 대화, 오랜 관계.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명확하다. 근거가 없거나, 근거가 서로 모순되거나, 그 상황을 본인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경우.
기준 ② — 최선의 이익
"이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가."
본인의 선호를 알 수 없을 때 쓰는 기준이다. 고통과 이익을 저울질해 판단한다.
문제는 '좋다'의 기준이 판단자의 것이 된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 연장이 좋은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편안함이 좋은 것이다. 그래서 이 기준은 실제로는 대리인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순서
임상윤리의 표준적 순서는 이렇다.
- 본인의 명시적 의사가 있으면 그것을 따른다.
- 없으면 대체판단을 시도한다.
- 그것도 불가능하면 최선의 이익으로 판단한다.
이 순서를 아는 것이 실무적으로 유용한 이유가 있다. 지금 몇 번에서 판단하고 있는지를 인식하면 대화가 정확해진다.
가족 사이의 다툼은 자주 이 층위가 섞여서 생긴다. 한 사람은 2번을 말하고("아버지는 이런 거 싫어하셨어") 다른 사람은 3번을 말하는데("그래도 살아 계신 게 낫지") 서로 같은 층위에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대리인이 지지 않아도 되는 것
여기가 이 화의 실무적 핵심이다. 대리결정자는 죽음의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니다.
이 구별을 분명히 해야 한다.
- 병이 사람을 죽게 한다.
- 대리인은 그 과정에서 무엇을 할지를 정한다.
이 문장은 위로가 아니라 사실이다. 인공호흡기를 중단하는 결정이 사망의 원인이 아니라, 회복 불가능한 병이 원인이다. 중단은 그 과정을 인위적으로 연장하지 않기로 한 선택이다.
이 인식이 없으면 대리인은 평생 자신을 가해자로 여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유족이 그렇게 산다.
대리인의 부담을 줄이는 세 가지
① 혼자 결정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이 함께 결정하고, 그 사실을 기록한다.
② 의료진의 권고를 요청한다. "저희가 정해야 합니까"가 아니라 "선생님이라면 무엇을 권하시겠습니까"를 묻는다. 의료진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고, 그 답이 있으면 가족의 부담이 크게 준다. 결정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③ 결정의 근거를 적어 둔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근거로, 어떤 논의를 거쳐 정했는지. 이 기록은 나중에 자신을 위한 것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흐려지고, 흐려진 기억은 자책으로 채워진다.
사전에 대리인을 준비시키는 법
대리인이 될 사람에게 미리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이 이 화가 4부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① 가치관을 알려 준다. 항목별 지시보다 판단의 기준이 더 유용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해라"보다 "나는 이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가 낫다. 예상 못 한 상황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② 재량을 준다. "내가 적어 둔 것과 다른 상황이 오면 네 판단을 믿는다"는 한 문장이 대리인을 크게 놓아준다.
③ 면책을 명시한다. "무엇을 정하든 원망하지 않는다. 이건 네 책임이 아니다." 이 문장을 문서에 적어 두는 것이 실제로 큰 차이를 만든다.
세 문장 모두 법적 효력과 무관하다. 그러나 사람을 살린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 다시
34화에서 남겨 둔 문제로 돌아온다. 사전에 정한 뜻과 현재의 상태가 어긋나 보일 때.
정리된 답은 없지만, 실무에서 쓰이는 접근은 있다.
- 현재 명백한 고통이 있으면 그것을 줄이는 것이 우선한다.
- 현재 명백한 즐거움이 있으면 그것을 없애는 방향으로 과거의 지시를 적용하지 않는다.
- 판단이 어려우면 되돌릴 수 있는 쪽을 택한다.
세 번째 원칙이 유용하다. 되돌릴 수 있는 선택과 없는 선택 중에서는 되돌릴 수 있는 쪽. 이것은 대리결정 전반에 적용되는 안전 원칙이다.
대리인이 여러 명일 때
가족이 여럿이면 사실상 여러 명이 대리인이다. 이 경우의 실무 원칙이다.
- 창구를 한 명으로 정한다. 의료진과의 소통 담당(94화).
- 결정은 함께 한다. 창구가 결정권자는 아니다.
- 의견이 갈리면 층위를 확인한다. 위의 1·2·3번 중 어디서 갈리는지.
- 그래도 안 되면 제3자를 넣는다. 병원의 윤리위원회나 완화의료팀에 자문을 요청할 수 있다
[미확인 — 기관별로 제도가 다르다].
대리결정 후의 애도
이 화에 덧붙일 것이 하나 있다. 대리결정을 한 사람의 애도는 다른 유족과 다르다.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 있다[등급 B — 임상에서 관찰되는 패턴이며 개인차가 크다].
- 결정의 재검토가 반복된다. "다르게 했으면 어땠을까"를 몇 년간 되풀이한다.
- 다른 가족의 반응에 민감해진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비난으로 들린다.
- 정보를 계속 찾는다. 그 병에 대해, 그 치료에 대해. 확인하려는 시도다.
- 죄책감이 신체 증상으로 나온다.
이 반응들은 병리가 아니라 대리결정의 정상적 후유증이다. 미리 알고 있으면 자기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예방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앞에서 말한 기록이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근거로 정했는지가 남아 있으면, 몇 년 뒤에 그 기록이 자신을 변호해 준다. 기억은 흐려지고, 흐려진 자리는 자책이 채운다.
대리인에게 미리 건네는 한 문장
대리결정을 부탁받은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내가 잘못 정하면 어떡하나"다. 이 부담을 실제로 덜어 주는 방법이 하나 있다. 본인이 미리, 문서로, 면책의 문장을 주는 것.
예를 들면 이런 형태다.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그것이 내 뜻이다. 상황은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를 것이고, 그때 판단할 사람은 너다. 결과가 어떻든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 문장을 그때 읽어라."
이 문장이 법적 효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리인이 결정 이후를 견디게 하는 데 실질적 효과가 있다. 대리결정을 한 가족에게서 장기적인 심리적 부담이 관찰된다는 보고가 있고, 그 부담의 상당 부분은 결정 자체가 아니라 "내 결정 때문에"라는 인과의 감각에서 온다.
같은 이유로 반대 방향도 필요하다. 결정의 기준을 남기는 것.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무엇을 견딜 수 없다고 보는지. 기준이 있으면 대리인은 자기 판단이 아니라 본인의 뜻을 집행하는 위치에 설 수 있고, 그 위치가 훨씬 견딜 만하다.
부탁하는 사람이 해야 할 마지막 일은 부탁이 아니라 면책과 기준을 함께 주는 것이다.
오늘의 실행
- 대리인은 죽음의 책임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한다. 병이 원인이고, 대리인은 방식을 정한다.
- "선생님이라면 무엇을 권하시겠습니까"를 묻는다. 결정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근거를 얻는 것이다.
- 내 대리인이 될 사람에게 세 문장을 남긴다. 가치관, 재량, 면책.
다음 화에서는 미국의 제도 — 사전지시서·POLST·의료대리인을 비교해, 한국 제도의 공백이 어디인지를 선명하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