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URANCE RESEARCH · 죽음 설계

대리결정의 윤리 — 남을 대신해 정한다는 것

대체판단과 최선의 이익, 그리고 둘 다 안 될 때

약 4분 읽기 · Updated 202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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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결정의 윤리 — 남을 대신해 정한다는 것

대체판단과 최선의 이익, 그리고 둘 다 안 될 때 | 죽음 설계 53화

문제의 구조

누군가를 대신해 그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결정을 내린다. 이것은 인간이 하는 가장 무거운 일 중 하나다.

윤리학과 임상윤리는 이 문제를 오래 다뤄 왔고, 두 개의 기준을 정리해 두었다[등급 A — 두 기준의 구별은 임상윤리에서 확립되어 있다].

기준 ① — 대체판단

"이 사람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했을까."

본인의 가치관, 과거의 발언, 삶의 방식을 근거로 그의 선택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접근이다.

작동하는 조건은 명확하다. 본인의 가치관을 알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문서, 대화, 오랜 관계.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명확하다. 근거가 없거나, 근거가 서로 모순되거나, 그 상황을 본인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경우.

기준 ② — 최선의 이익

"이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가."

본인의 선호를 알 수 없을 때 쓰는 기준이다. 고통과 이익을 저울질해 판단한다.

문제는 '좋다'의 기준이 판단자의 것이 된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 연장이 좋은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편안함이 좋은 것이다. 그래서 이 기준은 실제로는 대리인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순서

임상윤리의 표준적 순서는 이렇다.

  1. 본인의 명시적 의사가 있으면 그것을 따른다.
  2. 없으면 대체판단을 시도한다.
  3. 그것도 불가능하면 최선의 이익으로 판단한다.

이 순서를 아는 것이 실무적으로 유용한 이유가 있다. 지금 몇 번에서 판단하고 있는지를 인식하면 대화가 정확해진다.

가족 사이의 다툼은 자주 이 층위가 섞여서 생긴다. 한 사람은 2번을 말하고("아버지는 이런 거 싫어하셨어") 다른 사람은 3번을 말하는데("그래도 살아 계신 게 낫지") 서로 같은 층위에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대리인이 지지 않아도 되는 것

여기가 이 화의 실무적 핵심이다. 대리결정자는 죽음의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니다.

이 구별을 분명히 해야 한다.

  • 병이 사람을 죽게 한다.
  • 대리인은 그 과정에서 무엇을 할지를 정한다.

이 문장은 위로가 아니라 사실이다. 인공호흡기를 중단하는 결정이 사망의 원인이 아니라, 회복 불가능한 병이 원인이다. 중단은 그 과정을 인위적으로 연장하지 않기로 한 선택이다.

이 인식이 없으면 대리인은 평생 자신을 가해자로 여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유족이 그렇게 산다.

대리인의 부담을 줄이는 세 가지

① 혼자 결정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이 함께 결정하고, 그 사실을 기록한다.

② 의료진의 권고를 요청한다. "저희가 정해야 합니까"가 아니라 "선생님이라면 무엇을 권하시겠습니까"를 묻는다. 의료진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고, 그 답이 있으면 가족의 부담이 크게 준다. 결정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③ 결정의 근거를 적어 둔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근거로, 어떤 논의를 거쳐 정했는지. 이 기록은 나중에 자신을 위한 것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흐려지고, 흐려진 기억은 자책으로 채워진다.

사전에 대리인을 준비시키는 법

대리인이 될 사람에게 미리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이 이 화가 4부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① 가치관을 알려 준다. 항목별 지시보다 판단의 기준이 더 유용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해라"보다 "나는 이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가 낫다. 예상 못 한 상황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② 재량을 준다. "내가 적어 둔 것과 다른 상황이 오면 네 판단을 믿는다"는 한 문장이 대리인을 크게 놓아준다.

③ 면책을 명시한다. "무엇을 정하든 원망하지 않는다. 이건 네 책임이 아니다." 이 문장을 문서에 적어 두는 것이 실제로 큰 차이를 만든다.

세 문장 모두 법적 효력과 무관하다. 그러나 사람을 살린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 다시

34화에서 남겨 둔 문제로 돌아온다. 사전에 정한 뜻과 현재의 상태가 어긋나 보일 때.

정리된 답은 없지만, 실무에서 쓰이는 접근은 있다.

  • 현재 명백한 고통이 있으면 그것을 줄이는 것이 우선한다.
  • 현재 명백한 즐거움이 있으면 그것을 없애는 방향으로 과거의 지시를 적용하지 않는다.
  • 판단이 어려우면 되돌릴 수 있는 쪽을 택한다.

세 번째 원칙이 유용하다. 되돌릴 수 있는 선택과 없는 선택 중에서는 되돌릴 수 있는 쪽. 이것은 대리결정 전반에 적용되는 안전 원칙이다.

대리인이 여러 명일 때

가족이 여럿이면 사실상 여러 명이 대리인이다. 이 경우의 실무 원칙이다.

  • 창구를 한 명으로 정한다. 의료진과의 소통 담당(94화).
  • 결정은 함께 한다. 창구가 결정권자는 아니다.
  • 의견이 갈리면 층위를 확인한다. 위의 1·2·3번 중 어디서 갈리는지.
  • 그래도 안 되면 제3자를 넣는다. 병원의 윤리위원회나 완화의료팀에 자문을 요청할 수 있다[미확인 — 기관별로 제도가 다르다].

대리결정 후의 애도

이 화에 덧붙일 것이 하나 있다. 대리결정을 한 사람의 애도는 다른 유족과 다르다.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 있다[등급 B — 임상에서 관찰되는 패턴이며 개인차가 크다].

  • 결정의 재검토가 반복된다. "다르게 했으면 어땠을까"를 몇 년간 되풀이한다.
  • 다른 가족의 반응에 민감해진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비난으로 들린다.
  • 정보를 계속 찾는다. 그 병에 대해, 그 치료에 대해. 확인하려는 시도다.
  • 죄책감이 신체 증상으로 나온다.

이 반응들은 병리가 아니라 대리결정의 정상적 후유증이다. 미리 알고 있으면 자기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예방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앞에서 말한 기록이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근거로 정했는지가 남아 있으면, 몇 년 뒤에 그 기록이 자신을 변호해 준다. 기억은 흐려지고, 흐려진 자리는 자책이 채운다.

대리인에게 미리 건네는 한 문장

대리결정을 부탁받은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내가 잘못 정하면 어떡하나"다. 이 부담을 실제로 덜어 주는 방법이 하나 있다. 본인이 미리, 문서로, 면책의 문장을 주는 것.

예를 들면 이런 형태다.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그것이 내 뜻이다. 상황은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를 것이고, 그때 판단할 사람은 너다. 결과가 어떻든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 문장을 그때 읽어라."

이 문장이 법적 효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리인이 결정 이후를 견디게 하는 데 실질적 효과가 있다. 대리결정을 한 가족에게서 장기적인 심리적 부담이 관찰된다는 보고가 있고, 그 부담의 상당 부분은 결정 자체가 아니라 "내 결정 때문에"라는 인과의 감각에서 온다.

같은 이유로 반대 방향도 필요하다. 결정의 기준을 남기는 것.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무엇을 견딜 수 없다고 보는지. 기준이 있으면 대리인은 자기 판단이 아니라 본인의 뜻을 집행하는 위치에 설 수 있고, 그 위치가 훨씬 견딜 만하다.

부탁하는 사람이 해야 할 마지막 일은 부탁이 아니라 면책과 기준을 함께 주는 것이다.

오늘의 실행

  1. 대리인은 죽음의 책임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한다. 병이 원인이고, 대리인은 방식을 정한다.
  2. "선생님이라면 무엇을 권하시겠습니까"를 묻는다. 결정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근거를 얻는 것이다.
  3. 내 대리인이 될 사람에게 세 문장을 남긴다. 가치관, 재량, 면책.

다음 화에서는 미국의 제도 — 사전지시서·POLST·의료대리인을 비교해, 한국 제도의 공백이 어디인지를 선명하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