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쇠 — 병명 없이 진행되는 것을 읽는 법
예비력이라는 개념과 계단식 하강
노쇠 — 병명 없이 진행되는 것을 읽는 법
예비력이라는 개념과 계단식 하강 | 죽음 설계 31화
진단명이 없는 상태
노쇠(frailty)는 특정 질병이 아니라 여러 기관의 예비력이 함께 떨어져 스트레스에 취약해진 상태를 말한다[등급 A — 개념은 노인의학에서 확립되어 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병명이 없으므로 진단서에 적히지 않고, 치료 계획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가족은 "특별히 아픈 데는 없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는 가장 흔한 죽음의 경로 중 하나다.
예비력이라는 개념
노쇠를 이해하는 가장 유용한 개념이 예비력이다. 평소에는 쓰지 않지만 위기에 동원되는 여분의 능력.
젊고 건강한 사람이 폐렴에 걸리면 며칠 앓고 회복한다. 예비력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노쇠한 사람이 같은 폐렴에 걸리면 입원하고, 회복해도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 차이가 임종 궤적을 만든다. 노쇠에서의 하강은 완만한 경사가 아니라 계단이다.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한 계단씩 내려가고, 다시 올라오지 않는다.
계단의 신호
가족이 알아차려야 할 계단의 신호들이다.
- 입원 후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한다. 걷던 사람이 보행기를 쓰게 되고, 혼자 씻던 사람이 도움을 받게 된다.
- 낙상이 시작된다. 첫 낙상은 강한 신호다.
- 체중이 준다. 특별한 이유 없이.
- 활동 범위가 좁아진다. 외출이 줄고, 집 안에서도 이동이 준다.
- 여러 약을 먹고 있다. 다약제 복용 자체가 위험 요인이다.
- 인지 기능이 흔들린다. 약속을 놓치고, 같은 말을 반복한다.
세 번 이상 해당하면 궤적을 다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 시점이 준비를 시작할 시점이다.
노쇠에서 결정이 달라지는 이유
노쇠한 사람에게는 같은 치료의 손익이 달라진다. 이것이 이 화의 실무적 핵심이다.
수술. 회복 과정 자체가 큰 부담이 된다. 수술은 성공했는데 기능은 돌아오지 않는 결과가 흔하다. 항암 치료. 부작용을 견디는 능력이 낮다. 치료로 인한 손실이 이득을 넘을 수 있다. 중환자실. 침상 안정 자체가 근육과 인지 기능을 빠르게 떨어뜨린다. 검사. 결과가 치료 결정을 바꾸지 않는다면 검사 자체가 부담이다.
그래서 노인의학에서 반복되는 질문이 있다. "이 치료가 이 사람의 남은 삶에서 무엇을 좋게 하는가." 생존 기간인가, 기능인가, 증상인가. 셋은 자주 상충한다.
의사에게 물어야 할 질문
노쇠한 가족의 치료를 결정할 때 쓸 수 있는 질문들이다.
- "이 치료를 하면 기능이 좋아집니까, 아니면 검사 수치만 좋아집니까?"
- "회복 기간은 얼마이고, 그 뒤에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 "이 치료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 "이 나이와 이 상태에서 이 치료를 받은 분들의 경과는 대체로 어떻습니까?"
세 번째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 않는 선택지가 테이블에 올라와 있지 않으면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선택지는 대개 먼저 제시되지 않는다.
노쇠와 연명의료 결정의 관계
노쇠 궤적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의사결정 능력이 사망보다 훨씬 먼저 사라진다는 점이다(4화).
그래서 순서가 다르다. 다른 궤적에서는 의료 의사표시가 먼저지만, 노쇠 궤적에서는 권한 이전이 먼저다. 재산 관리, 계약, 의료 동의를 누가 할 것인지를 인지 기능이 남아 있을 때 정해야 한다.
임의후견 계약(165화)이 여기서 가장 크게 작동한다. 한국에서 가장 저평가된 제도이면서 노쇠 궤적에는 거의 필수적이다.
노쇠를 늦추는 것에 대하여
예방 쪽도 짧게 다룬다. 노쇠의 진행을 늦추는 데 근거가 비교적 견고한 것으로 언급되는 것들이 있다[등급 B — 방향성은 일관되나 개별 효과 크기는 대상에 따라 다르다].
- 저항 운동(근력 운동). 근감소증 대응에서 가장 자주 언급된다.
- 단백질 섭취.
- 다약제 정리. 불필요한 약을 줄이는 것 자체가 개입이다.
- 사회적 연결. 고립이 위험 요인으로 반복 보고된다.
- 시력·청력 교정. 감각 손실이 인지 저하와 낙상에 연결된다.
마지막 항목은 과소평가되어 있다. 안경과 보청기가 실제로 큰 차이를 만든다.
가족이 자주 하는 오해
"나이 드셔서 그런 것"이라는 해석. 실제로는 치료 가능한 원인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 갑상선, 빈혈, 우울, 약 부작용, 수면무호흡. 노쇠로 뭉뚱그리면 이것들이 가려진다.
"운동시키면 좋아진다"는 기대. 방향은 맞지만 속도의 기대가 과하면 서로 지친다.
"입원하면 나아진다"는 기대. 노쇠한 사람에게 입원은 손실을 동반한다. 입원의 이득이 손실보다 큰지가 매번 판단 대상이다.
노쇠와 치매가 겹칠 때
실제로는 노쇠와 인지 저하가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 이 조합이 가장 어려운 이유는, 판단 능력과 신체 능력이 동시에 떨어지면서 위험이 곱해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들이다.
- 약을 제대로 못 먹는다. 복용 착오가 곧바로 응급 상황이 된다.
- 낙상 위험이 급증한다. 판단력 저하가 위험 행동을 늘린다.
- 금전 관리에 문제가 생긴다. 이 시점에서 사기 피해가 자주 발생한다.
- 거부가 시작된다. 씻기·병원 가기·약 먹기를 거부한다. 이것이 돌봄자를 가장 지치게 한다.
이 조합에서 우선순위는 분명하다. ① 재산 관리 권한의 정리, ② 주거의 안전, ③ 복약 관리. 이 셋이 안 되어 있으면 나머지 준비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셋 다 본인의 판단 능력이 남아 있을 때만 순조롭게 정리된다.
노쇠에서 수술과 시술을 판단하는 법
노쇠한 사람에게 가장 자주 오는 결정이 수술·시술 여부다. 그리고 이 결정에서 나이는 생각만큼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 — 예비력이 변수다. 같은 80세라도 회복하는 사람과 회복하지 못하는 사람이 갈린다.
의료진에게 물어야 할 것은 성공률이 아니라 회복 경로다.
- "이 수술 후 입원 기간과 회복 기간이 얼마나 됩니까?"
- "회복 후 지금과 같은 생활로 돌아갈 가능성은요? 그렇지 않다면 어떤 상태가 됩니까?"
-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 가장 자주 빠지는 질문이다. 비교 대상이 없으면 판단이 성립하지 않는다.
- "이 나이·이 상태에서 섬망이나 기능 저하가 올 가능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노쇠한 사람에게서 반복 관찰되는 것은, 수술 자체는 성공했는데 그 뒤로 이전 수준의 생활을 회복하지 못하는 경과다. 병상에 오래 누워 있는 것만으로 근육과 인지 기능이 떨어지고, 그 손실이 되돌아오지 않는다. 수술의 성공과 회복은 다른 사건이다.
그래서 이 구간의 판단 기준은 "이 처치가 가능한가"가 아니라 "이 처치 후에 무엇이 남는가"다.
오늘의 실행
- 계단의 신호 여섯 개를 부모에게 대입한다. 셋 이상이면 준비를 시작한다.
- 네 가지 질문을 다음 진료 때 쓴다. 특히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 안경·보청기·복약 목록을 점검한다. 비용 대비 효과가 가장 큰 세 가지다.
다음 화에서는 암의 마지막 경과 — 가장 예측 가능하고, 그래서 가장 준비할 시간이 있는 궤적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