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 — 문학이 기록한 임종의 사회학
거짓말이 환자를 가장 외롭게 만든다
이반 일리치 — 문학이 기록한 임종의 사회학
거짓말이 환자를 가장 외롭게 만든다 | 죽음 설계 14화
왜 소설을 한 화 쓰는가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은 완화의료 교육에서 여전히 읽히는 텍스트다. 이유는 문학적 가치 때문만이 아니라, 임종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현상을 정확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140년 전의 관찰이 지금 병실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이 화는 소설의 줄거리가 아니라 그 안에 기록된 다섯 개의 현상을 다룬다.
현상 ① — 거짓말의 체계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통증이 아니라 모두가 그가 죽어 간다는 것을 알면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상황이다. 의사도, 아내도, 동료도 "곧 나아질 것"이라는 형식을 유지한다.
톨스토이의 통찰은 이 거짓말이 친절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아무도 악의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환자는 극단적으로 고립된다. 자기 상태에 대해 진실하게 말할 상대가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12화에서 다룬 병명 비고지 관행이 정확히 이 구조다. 한국에서 이 현상은 여전히 흔하다.
현상 ② — 사회적 죽음이 생물학적 죽음보다 먼저 온다
주변 사람들은 이반 일리치가 살아 있는 동안 이미 그를 과거형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동료들은 그의 자리를 누가 차지할지 계산하고, 가족은 일상의 계획에서 그를 뺀다.
현대 노년학에서는 이를 사회적 죽음(social death)이라 부른다[등급 A — 개념은 확립되어 있다]. 요양시설이나 장기 입원에서 흔히 관찰된다. 방문이 줄고, 결정에서 배제되고, 대화가 그의 머리 위로 오간다.
실무적 함의는 분명하다. 의식이 있는 한 결정에 참여시킨다. 답을 못 하더라도 앞에서 설명한다. 이것은 예의가 아니라 고통 관리다.
현상 ③ — 게라심의 존재
소설에서 유일하게 이반 일리치에게 위안이 되는 인물은 하인 게라심이다. 그는 특별한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환자가 죽어 간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몸을 만지는 일을 꺼리지 않는다.
이 인물이 완화의료 교육에서 자주 인용되는 이유가 있다. 임종기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위로의 말이 아니라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태도와 신체적 접촉이라는 것을 정확히 보여 주기 때문이다.
119화(위로가 실패하는 방식)에서 이 주제를 실무 수준으로 다시 다룬다. 미리 한 줄로 요약하면 — 좋은 말을 찾으려는 노력이 대개 실패의 원인이다.
현상 ④ — "내가 잘못 살았다면?"
소설 후반에 주인공은 자기 삶 전체를 의심한다. 성공적으로 보였던 경력, 적절했던 결혼, 올바랐던 처신이 사실은 전부 남의 기준에 맞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다.
이 장면이 보여 주는 것은 임종기의 회고가 위안이 아니라 고통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인생 회고를 무조건 권하는 접근이 위험한 이유다(13화에서 짚은 것과 같은 지점).
다만 소설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아들과 아내에 대한 연민을 느끼고, 그 순간 고통이 달라진다. 톨스토이의 답은 의미가 관계에서 온다는 것이다.
현상 ⑤ — 통증 관리의 부재
19세기 소설이라 당연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사흘을 소리 지르며 죽는다.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이 부분은 더 이상 필연이 아니다. 대부분의 말기 통증은 조절 가능하다[등급 A — 조절 가능성은 확립되어 있다. 조절률의 구체 수치는 문헌·상황에 따라 다르다].
이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할 때 실제로 떠올리는 이미지가 이반 일리치의 사흘이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는 이제 정확하지 않고, 정확하지 않은 공포는 잘못된 결정을 만든다 — 예를 들어 "고통스러울 바에는 아무 치료도 받지 않겠다" 같은.
한국 병실에서의 재현
다섯 현상 중 한국에서 특히 강하게 재현되는 것은 ①과 ②다.
①의 재현. 가족이 의료진에게 "본인에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 그리고 환자가 이미 알고 있으면서 가족을 배려해 모르는 척하는 장면. 양쪽이 서로를 배려하며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상태를 상호 가장(mutual pretense)이라 부른다[등급 A — 사회학 문헌에 확립된 개념].
②의 재현.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 앞에서 자식들이 어머니의 상태와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장면. 어머니는 그 자리에 있지만 대화의 대상이 아니다.
이 소설이 실무에 남기는 세 가지
첫째, 진실을 말할 상대 한 명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가족 전체가 부정의 태도를 유지하면, 환자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가족이 어렵다면 의료진·성직자·상담사·오래된 친구 중 한 명이라도 그 역할을 해야 한다.
둘째, 결정에서 배제하지 않는다. 의식이 있으면 참여시킨다. 참여가 불가능해진 뒤라도 그의 앞에서 그를 3인칭으로 말하지 않는다.
셋째, 위로하려 하지 말고 있어 준다. 게라심의 방식이다. 말을 찾지 못하겠으면 손을 잡고 앉아 있는 것이 낫다.
문학을 자료로 쓰는 것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방법론 한 줄. 소설은 근거가 아니다. 통계도, 임상 시험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시리즈가 한 화를 쓰는 이유는, 문학이 정량 자료가 포착하지 못하는 층 — 그 상황에 있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 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종 준비에서 결정을 좌우하는 것은 자주 그 층이다. 다만 문학에서 온 것은 관찰이지 증거가 아니라는 점을 표시해 둔다.
이반 일리치의 아내 — 간병자의 자리
소설은 주인공의 시점을 따르므로 아내 프라스코비야는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 인물을 다시 읽으면 다른 것이 보인다. 그는 몇 달째 간병 중이고, 남편은 계속 짜증을 내고,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는다.
간병자의 소진은 환자에 대한 냉담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냉담은 환자에게 정확히 감지되어 고립을 키운다. 악순환이다.
이 관점을 넣으면 소설의 장면이 달리 읽힌다. 두 사람 모두 고립되어 있고, 서로에게 위안이 되지 못하며, 각자 상대를 원망한다. 한국 병실에서 가장 흔한 구도이기도 하다. 5부 93~95화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이유다.
문학에서 더 가져올 것들
같은 이유로 읽을 만한 텍스트를 몇 개 적어 둔다. 어느 것도 근거가 아니라 관찰이다.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 점진적 기능 상실(루게릭)의 경과와 마지막 대화의 형식.
- 『숨결이 바람 될 때』 — 의사가 환자가 되는 과정. 예후 정보를 가진 사람의 결정.
- 『어떻게 죽을 것인가』(Being Mortal) — 문학은 아니지만 노쇠와 자율성 문제를 다룬 대표적 텍스트.
- 『애도 일기』 — 배우자·부모 상실 이후의 시간이 어떤 형태인지.
이 목록의 공통점은 통계가 못 보여 주는 시간의 질감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오늘의 실행
- "이 사람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있는가"를 점검한다. 부모든 배우자든, 없다면 그 자리를 만드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다.
- 환자 앞에서 3인칭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지 본다. 병실에서 흔히 벌어지고, 대부분 자각하지 못한다.
- 위로의 말을 준비하는 대신 시간을 준비한다. 30분을 비우고 아무 말 안 해도 되는 상태로 간다.
다음 화에서는 몽테뉴 —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오히려 삶을 방해할 수 있다는 반대편 주장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