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 — 카뮈와 사르트르가 죽음 앞에서 한 일
의미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시작하는 임종
부조리 — 카뮈와 사르트르가 죽음 앞에서 한 일
의미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시작하는 임종 | 죽음 설계 13화
부조리라는 개념
카뮈의 출발점은 간단하다. 인간은 의미를 요구하고, 세계는 답하지 않는다. 이 불일치가 부조리다. 부조리는 세계의 속성도 인간의 속성도 아니고 둘 사이의 관계다.
죽음은 이 불일치가 가장 선명해지는 자리다. 평생 쌓아 온 것이 한 번의 생물학적 사건으로 끝난다는 사실 앞에서 "왜"라는 질문은 답을 얻지 못한다.
카뮈의 세 가지 답과 그중 둘의 기각
『시지프 신화』는 부조리에 대한 세 가지 반응을 검토한다.
① 자살 — 부조리를 해소하려는 시도. 카뮈는 이를 기각한다. 불일치의 한쪽 항을 없애는 것은 해결이 아니라 회피라는 이유에서다. ② 철학적 도약 — 종교나 형이상학으로 의미를 도입하는 것. 카뮈는 이것도 부조리를 정직하게 견디지 않는 방식이라고 본다. ③ 반항 — 부조리를 인정한 채로 계속 사는 것. 카뮈의 선택이다.
세 번째가 이 시리즈에 남기는 것은 태도의 형식이다. 의미가 주어지지 않아도 행위는 계속된다. 시지프가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듯이.
임종기의 실존적 고통
이 논의가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완화의료에는 이에 대응하는 임상 개념이 있다. 실존적 고통(existential distress) — 통증이나 호흡곤란 같은 신체 증상이 아니라, 의미의 상실·존엄의 위협·짐이 된다는 느낌에서 오는 괴로움이다[등급 A — 개념은 완화의료에서 확립되어 있다. 유병률과 개입 효과의 수치는 문헌 확인 필요].
중요한 점은 이 고통이 진통제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임상에서는 자주 진통제와 진정제로 대응된다. 다룰 도구가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실존적 고통을 줄이는가
완화의료 영역에서 시도되어 온 접근들이 있다. 존엄 치료(dignity therapy), 의미 중심 치료(meaning-centered psychotherapy), 인생 회고(life review) 같은 것들이다[등급 B — 여러 시도가 보고되어 왔으나 효과 크기와 지속 기간에 대해서는 연구마다 결과가 다르다].
공통 구조는 비슷하다. 자기 삶을 서사로 다시 구성하고, 그것을 남길 형태로 만드는 것. 인터뷰하고, 기록하고, 편집해서 가족에게 남긴다.
카뮈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고, 만들어진 의미는 실제로 작동한다.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아도 그렇다.
사르트르 — 죽음은 나의 가능성이 아니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와 다르게 본다. 죽음은 나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 아니라, 밖에서 오는 우연한 사실이며 나의 기획을 중단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한 가지를 덧붙인다. 죽은 뒤 나의 삶은 타인의 해석에 넘겨진다. 내가 더 이상 설명하거나 반박할 수 없으므로, 내 삶의 의미는 남은 사람들이 정한다.
이 관점은 불편하지만 실무적으로 매우 정확하다. 실제로 사후에 벌어지는 일이 정확히 그렇다 — 유족이 고인을 어떻게 기억하고 이야기하는지가 그의 삶의 사회적 의미가 된다.
여기서 나오는 실무 항목
사르트르의 관점을 실행으로 옮기면 이렇다. 해석의 재료를 남기는 일.
- 기록(글·영상·음성)을 남기면 해석의 여지가 좁아진다.
- 관계에서 오해를 남기지 않으면 사후 해석이 갈리지 않는다.
- 특히 가족 사이에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가 자식마다 다른 말을 해 두면, 사후에 각자가 자기가 들은 말을 진심이라고 주장한다. 유산 분쟁의 흔한 발화점이다.
의미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나
정직하게 남겨야 할 문제가 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삶에서 의미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후회가 큰 삶, 관계가 파괴된 삶, 자기가 원한 것을 하나도 하지 못한 삶도 있다.
이 경우에 "의미를 찾으세요"라는 요구는 잔인하다. 임상에서 더 유용한 접근은 의미의 재구성이 아니라 작은 일의 완결인 경우가 많다. 한 사람에게 사과하기, 한 가지 물건을 누구에게 줄지 정하기, 하나의 빚을 갚기.
의미는 크게 오지 않아도 되고, 작은 완결이 실제로 통증을 줄인다. 이건 철학적 주장이 아니라 임상적 관찰이다[등급 B].
부조리와 종교의 관계
카뮈는 종교적 도약을 기각했지만, 이 시리즈는 그 판단을 따르지 않는다(6화의 규칙 — 무엇이 참인지 판정하지 않는다).
실무의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확립된 신앙 체계를 가진 사람은 임종에서 다뤄야 할 질문의 수가 적다. 사후에 대한 관념, 의례의 형식, 공동체의 지지가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앙이 참이라는 증거가 아니라, 준비의 부담이 다르다는 관찰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그 자리를 스스로 채워야 한다. 그래서 오히려 준비가 더 필요하다.
한국적 맥락 — 의미의 공백
한국의 특수한 조건이 하나 있다. 전통적 의미 체계(유교적 가족·조상 관념)는 약해졌는데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 충분히 자리 잡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임종의 의미 부여가 자주 자녀의 성취나 재산의 승계로 대체된다. "자식들 잘 키웠으면 됐다"는 문장이 그 형태다. 이 문장은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자식과의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 화가 남기는 것
셋으로 정리한다.
첫째, 의미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안전하다. 주어질 것을 기대하다가 안 오면 무너지지만, 만드는 것으로 시작하면 무너질 것이 없다. 둘째, 실존적 고통은 진통제로 해결되지 않는 별개의 증상이다. 이것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 임종기의 대응이 달라진다. 셋째, 내 삶의 사후 해석은 남이 한다. 그러므로 재료를 남기는 것이 실무다.
부조리를 견디는 실무적 형태
카뮈의 '반항'을 병상의 언어로 옮기면 무엇이 되는가. 임상에서 관찰되는 형태는 의외로 단순하다. 일과를 유지하는 것이다.
말기 환자에게 하루의 구조가 남아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크다. 아침에 씻고, 정해진 시간에 누구와 통화하고, 짧게라도 밖을 보는 것. 이것이 의미를 만들어 내지는 않지만 의미의 부재를 견딜 수 있는 형태로 만든다.
반대로 하루가 완전히 무정형이 되면 — 병실에서 시간 감각 없이 누워 있으면 — 실존적 고통이 급격히 커진다. 그래서 완화의료에서 일과와 환경(창·시계·달력·개인 물건)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정서적 배려가 아니라 증상 관리다.
남은 사람의 부조리
한 가지 놓치기 쉬운 것. 부조리는 죽는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은 사람이 더 오래 그것을 겪는다.
"왜 하필 그 사람이", "왜 그 나이에", "왜 그런 방식으로". 이 질문들에 답은 없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답을 만들어 주려 할 때 상황이 나빠진다 — "다 뜻이 있는 거야", "더 좋은 곳으로 가셨어" 같은 문장이 그것이다.
의미를 대신 만들어 주려는 시도가 왜 실패하는지는 119화에서 다룬다. 여기서는 한 줄만 적어 둔다. 답이 없는 질문에 답을 주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대화의 종료다.
오늘의 실행
- 실존적 고통이라는 항목을 알아 둔다. 가족이 임종기에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라고 말할 때, 그것은 통증 호소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고통이다. 진통제를 늘릴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필요하다.
- 작은 완결 세 가지를 적는다. 사과할 사람, 갚을 것, 정리할 물건. 크게 잡지 않는다.
- 가족 모두에게 같은 이야기를 했는지 점검한다. 자식마다 다른 말을 해 두었다면, 그것은 사후 분쟁의 씨앗이다.
다음 화에서는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 문학이 임종의 사회학을 어떻게 정확하게 기록했는지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