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URANCE RESEARCH · 죽음 설계

몽테뉴 — 준비가 삶을 방해할 때

"죽는 법을 배운다"에서 "죽음이 우리를 찾아오게 두라"로

약 4분 읽기 · Updated 202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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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 — 준비가 삶을 방해할 때

"죽는 법을 배운다"에서 "죽음이 우리를 찾아오게 두라"로 | 죽음 설계 15화

이 시리즈에 대한 반론을 한 화 배정한다

지금까지 14화 동안 "준비하라"고 말해 왔다. 이 화는 반대편을 정직하게 놓는다. 준비 자체가 해로울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주장의 가장 좋은 대변자가 몽테뉴다.

몽테뉴의 『에세』에는 죽음에 대한 태도가 시간에 따라 변한 흔적이 남아 있다. 초기에는 스토아적이다 — 「철학이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유명한 장에서 그는 죽음을 늘 염두에 두라고 말한다. 그런데 후기의 글에서는 결이 달라진다.

전환 — 낙마 사고

전환점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그의 낙마 사고 경험이다. 말에서 떨어져 거의 죽을 뻔했을 때, 그는 의식을 잃어 가는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오히려 부드럽고 몽롱했다는 것이다.

이 경험에서 그가 끌어낸 결론은 이렇다. 죽음은 상상보다 쉽고, 자연이 알아서 처리한다. 그러므로 죽음을 배우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몽테뉴는 후기에 이렇게 쓴다 — 농부들은 철학자보다 죽음을 잘 견디는데, 그건 그들이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반론의 핵심

몽테뉴의 반론을 현대적으로 정리하면 셋이다.

① 준비는 죽음을 앞당겨 겪게 한다. 한 번 죽을 것을 매일 죽는 셈이 된다. 실제로 겪는 고통보다 상상하는 고통이 총량으로 더 클 수 있다.

② 준비는 통제감의 착각을 판다. 아무리 준비해도 실제 죽음은 예상과 다르게 온다. 준비가 만든 각본이 실제 상황과 어긋나면 오히려 더 혼란스럽다.

③ 삶의 시간을 죽음에 쓴다. 준비에 쓰는 시간과 감정은 사는 데 쓸 수도 있었던 것이다.

세 반론 모두 진지하고, 세 번째는 특히 무겁다.

어디까지 맞는가

이 시리즈의 답을 분명히 해 둔다. 몽테뉴의 반론은 정서적 준비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맞고, 실무적 준비에 대해서는 맞지 않는다.

정서적 준비 — 매일 죽음을 상상하고 마음을 다잡는 훈련 — 는 효과가 불확실하고 사람에 따라 해롭다(10화에서 반추 문제로 다룬 것과 같다).

실무적 준비 — 문서, 목록, 기한, 위임 — 는 완전히 다르다. 이건 한 번 하면 끝나고, 하는 동안 죽음을 상상할 필요도 없다. 계좌 목록을 만드는 일은 죽음을 겪는 일이 아니다.

이 구분이 이 시리즈의 설계 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실행 항목이 언제나 구체적 작업의 형태를 띠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항목은 없다.

몽테뉴가 놓친 것

한 가지 반박을 덧붙인다. 몽테뉴의 시대와 지금의 결정적 차이는 의료 기술의 존재다.

16세기에는 죽음이 대체로 자연이 처리했다. 결정할 것이 별로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인공호흡기를 달 것인가, 투석을 시작할 것인가, 중환자실로 옮길 것인가 — 결정 지점이 수십 개다. 결정 지점이 있는 곳에는 준비가 유효하다.

그러므로 몽테뉴의 "자연에 맡기라"는 조언은 오늘날 문자 그대로 실행할 수 없다. 맡기는 것 자체가 하나의 결정이고, 그 결정도 미리 표시해 두지 않으면 실행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조차 문서가 필요한 시대다.

농부와 철학자의 비교에 대하여

몽테뉴가 든 예 —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더 잘 견딘다 — 는 지금도 관찰된다. 그리고 이 관찰을 어떻게 다룰지가 실무에서 실제로 문제가 된다.

부모가 죽음 이야기를 전혀 하고 싶어 하지 않을 때, 억지로 끌어내는 것이 옳은가. 답은 대개 아니다. 주제를 강요하는 것과 필요한 결정을 확보하는 것은 다른 일이고, 후자는 앞의 것 없이도 가능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대신 "이 통장 정리 좀 도와드릴까요"로 접근하는 방식이 있다. 죽음이라는 단어 없이 실무의 절반을 처리할 수 있다. 64화에서 이 기술을 자세히 다룬다.

준비의 상한선

몽테뉴에게서 가져올 실용적 결론이 하나 더 있다. 준비에는 상한이 있다.

어느 지점을 넘으면 준비는 수확 체감으로 들어간다. 유언장을 다섯 번 고치고, 장례 절차를 분 단위로 정하고, 유품의 배분을 물건마다 지정하는 것. 이 단계는 대개 준비가 아니라 불안의 표현이고, 유족에게는 부담이 된다.

실용적 상한선을 제시하면 이렇다. 문서 다섯 종, 목록 세 개, 사람 세 명. 이걸 넘어가면 늘리는 대신 갱신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92화에서 이 세트를 정리한다.

한국적 맥락 — 회피와 과잉 사이

한국의 현실은 흥미롭게도 양극단이 공존한다. 대다수는 회피 쪽에 있고(죽음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소수는 과잉 쪽에 있다(상조 상품을 여러 개 가입하고 수의를 미리 맞춘다).

두 극단의 공통점은 실제로 필요한 것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회피하는 쪽은 문서가 없고, 과잉인 쪽은 장례 준비는 완벽한데 연명의료 의사표시나 재산 목록이 없는 경우가 흔하다.

장례는 남이 해 주지만 의료 결정은 아무도 대신 못 한다. 우선순위가 뒤집혀 있는 것이다.

준비를 미루는 것과 안 하기로 정하는 것

몽테뉴의 입장을 실제로 채택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선택이어야지 방치여서는 안 된다.

둘의 차이는 하나다. 안 하기로 정한 사람은 그 사실을 가족에게 말한다. "나는 세세한 지시를 남기지 않겠다. 너희가 판단해라. 무엇을 정하든 원망하지 않는다." 이 말이 있으면 유족은 죄책감에서 상당히 자유로워진다.

반면 미룬 사람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는다. 유족은 "아버지가 원하셨을 것"을 추정하며 다투고, 각자 자기 추정이 맞다고 믿는다. 같은 무(無)지만 결과가 완전히 다르다.

준비가 실제로 삶을 좋게 만드는 경우

마지막으로 반대 방향의 관찰 하나. 준비가 삶을 방해한다는 몽테뉴의 우려와 달리, 실무에서는 그 반대 현상도 자주 보인다.

문서를 정리하고 나면 불안이 줄어 그 주제를 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미완의 과제는 계속 의식에 떠오르지만 끝난 과제는 떠오르지 않는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가 오히려 죽음 생각의 빈도를 높인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실행 항목은 전부 끝낼 수 있는 크기로 잘라 두었다. 끝나지 않는 과제는 몽테뉴가 경고한 그 상태 — 매일 조금씩 죽는 상태 — 를 만든다. 반대로 한 번에 끝나는 과제는 하고 나면 잊을 수 있다.

상한선을 넘긴 준비의 신호

준비의 상한을 말했으니 넘긴 신호도 적어 둔다. 아래에 해당하면 준비가 아니라 불안을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 같은 문서를 여섯 달 안에 세 번 이상 고쳤다.
  • 유품의 배분을 물건 단위로 지정하고 있다.
  • 장례 절차를 시간 단위로 적고 있다.
  • 준비를 하고 나서 오히려 그 생각이 더 자주 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준비가 아니라 닫는 행위다. 문서를 봉투에 넣고, 위치를 한 사람에게 알리고, 다음 갱신일을 달력에 적고 끝낸다. 끝냈다는 표시가 있어야 마음이 그 항목을 놓는다.

오늘의 실행

  1. 정서적 준비와 실무적 준비를 나눈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항목은 미뤄도 되고, 손으로 하는 항목은 오늘 해도 감정 비용이 거의 없다. 후자부터 한다.
  2. 준비의 상한선을 정한다. 문서 다섯·목록 세 개·사람 세 명. 다 되면 그만한다.
  3. 가족이 이 주제를 거부하면 우회 경로를 쓴다. 죽음이라는 단어 없이 실행 가능한 항목이 절반 이상이다.

다음 화부터 네 화 동안은 종교와 전통이 죽음을 어떻게 다뤄 왔는지를 본다. 유교·불교·기독교, 그리고 한국의 무속. 신앙의 진위가 아니라 의례가 실제로 무슨 일을 하는가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