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연구의 쓸모 — 무작위배정이 불가능한 질문들
흡연과 폐암은 RCT로 증명된 적이 없다
관찰연구의 쓸모 — 무작위배정이 불가능한 질문들
흡연과 폐암은 RCT로 증명된 적이 없다 | 건강 설계 200 9화
증명되지 않았지만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것
흡연이 폐암을 일으킨다는 명제를 무작위배정 시험으로 증명한 적은 없다. 있을 수도 없다. 사람 수천 명을 동전 던지기로 흡연군에 배정해 20년간 담배를 피우게 하는 연구는 어떤 윤리위원회도 통과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이 명제를 의심하는 전문가는 없다. 관찰연구만으로도 인과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언제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다.
2화에서 근거의 위계를 세우면서 "RCT가 아니면 근거가 아니다는 틀렸다"고 적었다. 이 화는 그 문장의 근거를 채운다.
인과를 판단하는 오래된 기준들
1960년대에 통계학자 브래드퍼드 힐이 정리한 관점들이 지금도 쓰인다. 체크리스트가 아니라 판단의 재료로 쓰라는 것이 원래 취지였다.
연관의 강도. 흡연자의 폐암 위험은 비흡연자의 몇십 배다. 이 정도 크기를 교란으로 만들려면, 흡연과 거의 완벽하게 같이 다니면서 폐암 위험을 몇십 배 올리는 미지의 변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반면 20~30% 차이는 교란으로 쉽게 만들어진다. 이 비대칭이 핵심이다.
일관성. 다른 나라, 다른 시기, 다른 연구 방법에서 같은 방향이 반복해서 나오는가.
시간적 선후. 노출이 결말보다 먼저였는가(6화).
용량-반응. 많이 노출될수록 위험이 커지는가. 하루 담배 개비 수에 따라 폐암 위험이 계단식으로 올라가는 것이 대표적이다.
생물학적 개연성과 정합성. 알려진 기전으로 설명되는가, 다른 사실들과 어긋나지 않는가.
중단 실험. 노출을 없애면 위험이 내려가는가. 금연 후 폐암 위험이 시간에 따라 감소한다는 관찰이 여기 해당한다.
이 관점들이 여러 개 동시에 충족되면, RCT가 없어도 인과로 다룬다. 흡연과 폐암은 전부 충족했고, 대부분의 영양역학 결과는 첫 번째(강도)에서 이미 걸린다.
관찰연구가 유일한 길인 질문들
해로운 노출. 대기오염, 소음, 방사선, 직업적 화학물질 노출. 사람에게 일부러 노출시킬 수 없다.
아주 긴 시간. 20~40년에 걸쳐 나타나는 결말. RCT로 감당할 비용이 아니다.
드문 결말. 만 명 중 몇 명 수준의 사건은 RCT의 표본 크기로 잡히지 않는다. 약의 드문 부작용이 대개 시판 후 관찰에서 발견되는 이유다.
실제 세계의 사용. RCT는 조건이 좋은 참가자를 고른다. 고령자, 여러 병을 가진 사람, 여러 약을 함께 먹는 사람은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정작 그 약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들이 시험에서 빠져 있다. 이 간격을 메우는 것이 관찰연구다.
대상 집단의 차이. 한국인 데이터가 필요한데 한국에서 대규모 RCT가 없는 경우, 국민건강보험 자료 기반 관찰연구가 현실적인 유일한 답이다. 이 시리즈가 한국 관련 내용에서 관찰연구를 자주 인용하게 되는 이유다.
최근 방법론이 바꾼 것
관찰 데이터로 인과에 접근하는 방법이 지난 20년간 크게 발전했다.
표적 시험 모사(target trial emulation). 관찰 데이터를 "만약 RCT를 설계했다면 어떻게 했을까"의 틀로 재구성한다. 시작 시점 정의, 자격 기준, 배정 시점을 명시하면 흔한 오류들이 상당 부분 제거된다. 실제로 이 방법을 적용했더니 관찰연구와 RCT의 결과 차이가 크게 줄었다는 보고가 여럿 있다.
멘델 무작위화. 유전형은 태어날 때 무작위로 배정되고 병이 유전형을 바꾸지 못하므로, 역인과와 상당수의 교란이 차단된다. LDL·혈압·알코올처럼 유전 변이가 뚜렷한 노출에서 강력하다.
자연 실험. 정책 변화, 제도 도입, 지역 간 차이처럼 사람이 선택하지 않은 변화를 이용한다. 담뱃세 인상, 실내 흡연 금지, 검진 제도 도입이 여기 해당한다.
그럼에도 남는 경계
이 방법들이 만능은 아니다. 멘델 무작위화는 유전 변이가 다른 경로로도 작용하면 결과가 왜곡되고, 평생 노출의 효과를 추정하므로 "지금 중년에 개입하면 얼마나 이득인가"에는 직접 답하지 못한다. 자연 실험은 그 변화가 정말 외생적이었는지에 결과가 달려 있다.
그래서 실무적 규칙은 이렇게 남는다. RCT와 관찰이 갈리면 RCT를 따르되, RCT가 없는 영역에서는 관찰연구의 조건을 따져 인과의 등급을 매긴다. 관찰이라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찰인지를 보는 것이다.
이 시리즈에서의 취급
앞으로 각 화에서 [코호트] 표시가 붙는 내용은 이런 뜻이다. 무작위배정 근거는 없지만, 방향과 크기가 여러 연구에서 일관되게 관찰된 것. 그중에서도 연관의 크기가 크고, 용량-반응이 있고, 기전이 맞고, 유전·자연 실험 등 다른 방법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본문에서 그렇게 명시한다.
반대로 관찰 하나만 있고 다른 각도의 지지가 없는 것은 [근거 불충분] 으로 표시한다. 이 구분을 흐리지 않는 것이 2화에서 약속한 계약이다.
한국 데이터가 특히 관찰연구에 의존하는 이유
이 시리즈가 한국 관련 내용에서 관찰연구를 자주 인용하게 되는 데는 구조적 이유가 있다.
한국은 전 국민을 포괄하는 단일 보험 체계와 국가건강검진 자료를 갖고 있다. 청구 자료에 검진 자료를 연결하면 수백만 명 규모의 코호트가 만들어지고, 사망 자료까지 연결되면 장기 결말까지 추적된다. 인구 전체가 하나의 코호트에 가깝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조건이다.
동시에 한계도 분명하다. 청구 자료의 진단명은 진료비 청구를 위해 입력된 것이라 실제 임상 진단과 어긋나는 경우가 있다. 검진 자료의 생활습관 항목은 자가 보고이고, 흡연·음주 문항은 특히 과소 보고되는 경향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검진을 받는 사람 자체가 받지 않는 사람과 다르다 — 5화의 건강한 사용자 편향이 여기서도 작동한다.
그래서 한국 자료 기반 연구를 읽을 때의 태도는 이렇게 정리된다. 규모와 추적 기간은 신뢰하고, 노출 변수의 정밀도는 의심한다. 진단·처방·사망처럼 행정적으로 기록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단단하고, 식습관·운동량처럼 물어서 얻은 것은 무르다.
정리하면, 관찰연구를 대하는 태도는 이분법이 아니다. 버리는 것도 아니고 그대로 믿는 것도 아니라, 조건을 따져 무게를 매기는 것이다. 그 무게를 매길 줄 알게 되면, 매년 쏟아지는 연구 소식 중 대부분은 흘려보내고 소수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1부 전체가 하려는 일이다.
정리
- 핵심 — 무작위배정이 불가능한 질문이 많고, 관찰연구는 조건을 갖추면 인과에 도달할 수 있다. 판단의 핵심은 연관의 크기·일관성·용량-반응·시간 순서·다른 방법과의 일치다.
- 근거 등급 — [코호트] 이 화 자체는 방법론이지만, 흡연-폐암처럼 관찰만으로 확립된 인과가 실재한다는 것이 근거다.
- 내가 할 것 — 관찰연구를 만나면 버리지도 믿지도 말고 등급을 매긴다. 연관이 몇 배 단위면 무겁게, 20~30% 수준이면 가볍게 취급한다.
- 모르는 것 — 관찰연구가 인과를 말할 수 있는 경계에는 합의된 컷오프가 없다. 방법론이 발전해도 이 판단은 사안별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