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오는 세 가지 궤적 — 급성사·장기 질환·노쇠
궤적이 다르면 준비의 순서도 완전히 달라진다
죽음이 오는 세 가지 궤적 — 급성사·장기 질환·노쇠
궤적이 다르면 준비의 순서도 완전히 달라진다 | 죽음 설계 4화
왜 궤적을 먼저 보는가
"죽음을 준비한다"는 말이 모호한 이유는, 죽음이 한 가지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화의료 연구에서는 임종에 이르는 기능 저하의 곡선을 몇 가지 전형으로 나눠 왔다. 대표적인 것이 급성사, 장기 질환(암 등)의 궤적, 장기 부전의 궤적, 노쇠·치매의 궤적이다[등급 A — 궤적 개념 자체는 완화의료에서 널리 쓰이는 분류다. 다만 각 궤적의 비율·기간을 나타내는 구체 수치는 자료마다 다르므로 인용하지 않는다].
이 시리즈에서는 실행의 관점에서 셋으로 줄인다. ① 예고 없는 급성사, ② 진단이 있는 장기 경과, ③ 진단 없이 진행되는 노쇠. 준비의 순서가 셋 다 다르다.
① 급성사 — 준비는 전부 사전에만 가능하다
심근경색, 뇌출혈, 사고, 급성 감염. 특징은 결정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본인은 대개 처음부터 의사표시를 못 하고, 가족은 몇 시간 안에 인생에서 가장 큰 결정을 한다.
이 궤적에서 사후에 할 수 있는 준비는 0이다. 그래서 급성사에 대한 준비는 전부 오늘 해 두는 것의 형태를 띤다.
- 의사표시 문서가 이미 존재하는가
- 재산·부채·보험의 위치를 누가 아는가
- 어린 자녀가 있다면 그 아이의 생활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 사업체가 있다면 내일 아침 누가 문을 여는가
급성사는 젊을수록 상대적 비중이 커진다. 그래서 30·40대의 준비는 이 궤적을 기준으로 설계한다(193화).
한 가지 반직관적인 사실. 급성사는 준비할 것이 가장 적어 보이지만, 준비의 효과 차이는 가장 크다. 왜냐하면 이 궤적에서는 준비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결과가 완전히 갈리기 때문이다. 장기 경과에서는 준비를 안 했어도 도중에 만회할 시간이 있다.
② 장기 경과 —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이 착시를 만든다
암이 대표적이다. 진단 이후 상당 기간 기능이 유지되다가, 마지막 몇 개월에 비교적 빠르게 떨어지는 형태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등급 B — 전형적 패턴이며 암종·치료 반응에 따라 크게 다르다].
이 궤적의 함정은 "아직 시간이 있다"는 감각이다. 기능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준비를 미루게 되고,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하면 이미 준비할 체력과 판단력이 없다. 실무에서 가장 흔한 후회가 여기서 나온다 — "그때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그래서 이 궤적의 준비 원칙은 하나다. 진단 직후 90일 안에 핵심을 끝낸다. 몸이 가장 좋은 시기가 그때이고, 그 시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 196화에서 이 90일을 따로 설계한다.
③ 노쇠와 치매 — 가장 길고, 가장 준비가 안 되는 궤적
진단명이 없거나 여러 개다. 특별한 사건 없이 서서히 기능이 떨어지고, 낙상이나 폐렴 같은 사건마다 한 계단씩 내려간다. 기간은 몇 년에서 십 년 이상이다.
이 궤적의 결정적 특징은 의사결정 능력이 죽음보다 훨씬 먼저 사라진다는 것이다. 치매의 경우 이 간극이 5년, 10년이 될 수 있다. 그 기간 동안 재산은 사실상 동결되고(166화), 계약도 소송도 유언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 궤적을 전제로 한 준비는 다른 두 궤적과 순서가 다르다. 의료 문서보다 권한 이전 문서가 먼저다. 임의후견 계약(164·165화)이 여기서 가장 크게 작동한다. 한국에서 가장 저평가된 제도이면서 동시에 가장 필요한 제도다.
궤적은 섞인다
실제로는 한 사람이 두 궤적을 겹쳐 겪는 경우가 많다. 치매가 진행 중인 노인이 폐렴으로 급성 악화되는 식이다. 그래서 궤적은 배타적 분류가 아니라 어느 준비를 먼저 할지 정하는 도구로 쓴다.
판단은 간단한 질문 하나로 시작할 수 있다. "이 사람의 의사결정 능력이 사라지는 시점이 죽음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거의 동시라면 ①, 몇 주~몇 달이면 ②, 몇 년이면 ③이다. 간격이 길수록 권한 이전의 설계가 중요해진다.
한국의 조건 — 궤적을 바꾸는 제도들
한국에서는 세 궤적의 경험이 제도에 의해 크게 굴절된다.
요양병원의 존재. 노쇠 궤적의 상당 부분이 요양병원에서 진행된다. 요양병원과 요양원은 성격이 다르고(97화) 비용 구조와 의료 접근성이 다르다. 어느 쪽에 있느냐가 임종의 양상을 크게 바꾼다.
응급실 경유의 관성. 재택이나 시설에서 상태가 나빠지면 대부분 응급실로 온다. 응급실은 소생을 기본값으로 작동하는 곳이다. 그래서 사전 의사표시가 없으면 원치 않는 소생술이 시작되고, 시작된 것은 중단이 훨씬 어렵다(37화의 비대칭).
호스피스 접근의 시점. 호스피스는 늦게 연결될수록 이용 기간이 짧아진다. 늦게 연결되는 가장 큰 이유는 "포기하는 것 같아서"라는 정서적 저항이다(45화에서 이 오해를 해체한다).
궤적별로 무엇이 가장 먼저 실패하나
같은 준비 항목이라도 궤적에 따라 실패 지점이 다르다. 이걸 알아 두면 우선순위를 다시 계산할 필요가 없다.
급성사에서 가장 먼저 실패하는 것 — 정보 접근. 본인만 알던 것들이 그대로 사라진다. 어느 은행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보험에 들어 있는지, 회사의 어떤 계정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 유족은 사망 조회 제도로 상당 부분을 복구할 수 있지만(79·80화), 조회에 잡히지 않는 것 — 대여금, 보증, 해외자산, 암호화폐 지갑 — 은 영구히 사라진다.
장기 경과에서 가장 먼저 실패하는 것 — 시점. 준비의 내용은 대개 알고 있다. 다만 "지금은 아직"이라고 미루다가, 미룰 수 없게 된 시점에는 이미 서명할 힘이 없다. 특히 유언은 유언능력이 요구되므로, 인지 기능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나중에 효력 다툼의 빌미가 된다(150화).
노쇠 궤적에서 가장 먼저 실패하는 것 — 권한. 재산은 있는데 쓸 수 없는 상태가 몇 년씩 이어진다. 자식이 부모 계좌에서 병원비를 꺼내지 못하고, 부모 명의 부동산을 정리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궤적에서는 의료 문서보다 권한 이전이 먼저다.
궤적을 오해하면 생기는 일
임상에서 반복되는 오해가 둘 있다.
첫째, 노쇠를 장기 경과로 착각하는 것. "치료하면 나아진다"는 기대가 유지되면서 여러 번의 입원과 시술이 반복된다. 매번 조금씩 더 나빠지고, 매번 회복 기간이 길어진다. 이 패턴이 세 번 반복되면 궤적을 다시 읽어야 한다는 신호다.
둘째, 장기 경과를 급성사처럼 다루는 것. 시간이 있는데도 아무 준비 없이 마지막 몇 주에 몰아서 결정한다. 진단 시점과 임종 시점 사이에 몇 달의 좋은 시기가 있었는데도 그 시기를 인식하지 못한 경우다.
두 오해 모두 "지금 어느 궤적에 있는가"를 주기적으로 다시 묻지 않아서 생긴다. 궤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갱신하는 판단이다. 최소한 입원할 때마다 한 번씩 다시 묻는다.
오늘의 실행
- 나와 부모 각각에 대해 지금 어느 궤적에 있는지 적는다. 건강한 40대는 ①, 암 진단을 받은 부모는 ②, 80대 후반의 조부모는 ③이다.
- 궤적별로 이 시리즈에서 먼저 읽을 화를 정한다. ①이면 61~62화와 77~78화, ②면 196화와 3부, ③이면 164~166화와 97~99화.
- 간격 질문에 답한다. "이 사람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되는 시점"과 "사망 시점"의 예상 간격을 적는다. 이 간격이 길면 문서보다 사람(누가 대신 결정하는가)이 먼저다.
다음 화에서는 한국에서 사람이 실제로 어디서 죽는지 — 장소가 임종의 내용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본다.